묵상 나눔
환난 중의 위로(고후1:3-11, 2016년 9월 4일 주일)

환난 중의 위로(고후1:3-11,2016 9 4일 주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 1문에 보면, 이렇게 질문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교리문답은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몸과 영혼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몸과 영혼은 나의 신실하신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셨습니다.”

    여러분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에 위로는 어떤 게 있습니까? 얼마 전 브라질 리우 올림픽이 끝나고 나니까,교인 중에 어떤 분들은 이제 무슨 낙으로 사느냐? 그럽니다. TV 스포츠나 드라마는 분명 인생의 조그마한 위로 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처럼,여러분에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 답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위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고 있는 정답 말고,사실을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묻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여러분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 힘드시죠?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은 정답실제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정답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그러나 그 정답이 우리의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위로라는 단어를 10번이나 사용합니다.그리고 환난, 고난이라는 단어를 8번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위로라는 단어를 두 번 더 사용해서라도 고린도후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정말 위로를 주고 싶었던것 같습니다. 이제 3절을 보세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을 새번역성경에서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했고,공동번역에서는 모든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이런 단어를 사용했다는것은 뭘 강조하는 것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모든 위로에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있습니까? 답은 하나님이죠.

    기독교 신앙은 근원자를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근원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잘 못 받아들인 사람들은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위로, 온갖 위로에 목을 맵니다. 성경의 관심은 그 위로의근원자가 누구시냐? 라는 것이죠. 그 근원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은내가 무슨 위로를 받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다만 누가 유일한 위로자 이신줄 아느냐?”라고 물어야 답이 나옵니다.

    만약 여러분의 집 대문 앞에 한 달에 한 번씩 꼬박 꼬박쌀 한 포대가 놓여 있다면, 정말 좋겠지요? 재정 형편이 좋지 않은집이라면 더없이 그 쌀 한 포대가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 쌀을 받고도,정작 그 쌀을 놓고 간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요? 없을수 없겠지요. 당연히 궁금해지겠지요. 도대체 누가 이 쌀을 우리 집에놓고 갈까?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고 싶어 하겠지요.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 왜곡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쌀에는 관심이 많은데, 쌀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영생은 받아서 좋은데, 영생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 관심이 없습니다.영생은 받았다고 하면서, 그 영생의 근원이신 분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면 그것은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위로는 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쌀을 주시는분에게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분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알고싶어 하고, 가까워지기를 갈급해 하는 것이지요.

    구약 성경에는 이 위로에 관한 왜곡된 현상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만나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16:12).하나님께서 출애굽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백성들이 만나와 메추라기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그것을 내려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위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수많은 위로 중 한 조각에 불과한만나에집착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출애굽 백성이 그랬지요. 그래서 하나님은어떤 장치를 두시나요? 한 사람 당 한 오멜씩 취하되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남겨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날 정도로 썩어 버립니다 (16:20).선물을 주신 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지 않고, 단지 선물에 집착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유일한 위로는 모든 종류의 위로를 내려주시는 근원자이신 하나님이시며, 그 분을 알아가야 합니다.

    자 이제 오늘 본문은 위로의 근원자 되신 하나님의 위로가어디까지 미치는지, 그 범위를 말씀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4). 여기서 또 모든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3절의 모든 위로모든과 똑같은 헬라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파스ς)’라는 단어인데요. 영어로는 each, every, all things, some of all types 라는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종류의 환난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그 모든 종류의 환란에도 불구하고, 위로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께는 모든 종류의 환난에 맞는 모든 종류의 위로또한 가지고 계십니다.

    그럼 이제 잠시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 한가지를 정리하고넘어갑시다. “전지하심”(omniscience). 하나님께서 사람이당하는 모든 종류의 고난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 또한 그것에 맞는 모든 종류의 위로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께서는 전지하십니다. 하나님의전지하심은 하나님께서만이 절대지식을 가지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식은 무결점의 완벽한 지식입니다.무결점의 완벽한 지식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말은, ① 모든 문제의 원인을알고 계시며, ② 모든 문제의 고통의 깊이를 알고 계시며, ③ 모든문제의 해결 방법을 알고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지하심입니다.이것이 고통 중에 있는 신자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만의고통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완벽히 이해하고 계시며, 나보다 더 훨씬 깊이 그것을 파악하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이것이 위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계실까요?특별히 사람에 대해서 어떤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실까요? 139편은 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 거지를 아십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139:2). 하나님께는 사람이 혼자 있을 때의 행동까지 다 아십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의 행동도 하나님은 놓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람이잠자는 중에도 잠꼬대의 말도 기억하시며, 이를 갈거나 또는 비몽사몽간에 몸을 뒤척이면서 불면증에 시달려 하는모습까지 아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도 포착하십니다. 중추신경이 연결되어 오장육부가 어떻게 움직이고, 허파의 들숨과 날숨이 몇 번씩 어떻게 개인에게일어나는 지 세고 계십니다. 심장의 박동을 아시고, 피 속의 적혈구,백혈구, 혈소판의 움직임을 다 포착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모든 생각을 아십니다.“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139:2). 하나님은 사람의 뇌파의 움직임까지 포착하십니다. 사람의 잊어버린 기억까지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상처 입은 영혼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상처의 이유를 아시며, 매일 매일 받고있는 스트레스가 어떻게 그 사람의 피의 흐름을 막는지 아십니다. 한 침대를 쓰는 배우자도 알지 못하는 속앓이를하나님은 정확히 파악하십니다. 지금 어떤 생각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어떤 생각 때문에 막막해 하는지 그 원인과 해결책을 아십니다.

    사람의 모든 할 말을 아십니다.“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139:4).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혀를 놀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는내가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하나님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십니다.

    나는 아내가 말하지 않으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둘러서 얘기해도 그것의 절반은 엉뚱하게 알아 듣습니다. 아내가 한 번은 교회 사무실에 있는 제게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몇 시에 들어 와요?””응 나 책 좀 더 읽다가 갈게요. 먼저 애들이랑 밥 먹어요그러면 아내는 그러세요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그런데 …”라고 한 그 말이 마음에 걸려서 혹시 집에 맛있는 거라도 해서 일찍 들어오라고 그러나?하고예상보다 일찍 퇴근해 들어갑니다. 그러면 왜 이리 일찍 왔냐고 그럽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그래서 전화한 거 아니오?”라고하면, “그게 아니라, 지금 퇴근할 거면 올 때 지원이 태권도 학원에서픽업을 해서 들어오라는 얘기였어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아내의 둘러서말하는 것 속내를 아직도 잘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둘러서 말하는 그 저의까지도 정확하게파악하십니다. “지금 나는 힘들어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서그저 나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혀에 숨어 있는 진심을 이미 들으십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의 힘든 형편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다 하더라도,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의 혀에 숨어 있는 무언의 말을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사람의 지식보다 그 질과 양에서 비교할수 없이 정확하고 완벽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어떤 일로 고통을 겪기 전부터 우리의 고통을 이미보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미래의 일이 하나님에게는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하나님께는 미래라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시제, 현재시제, 미래시제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평면입니다.위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내려다 보신다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바깥에 계십니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보고 계셨으며…”(새번역, 139:16).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자의 고통을 뒤 늦게 아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보셨고,또한 지금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살아갑니다.절대 하나님의 지식 의 바깥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를감싸며, 그 안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일어납니다.

    이 전지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숨바꼭질할 수 없습니다. 어디로 도망치거나 숨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가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139: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영혼의 레이더이시며, 우리가 피하고, 숨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전지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유일한 위로자가 되시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어떤 특별한 한 종류의 고난에 대해서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5).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난이 많은것 처럼기독교 신자가 되면 그리스도로 인해서 고난을 많이 당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매일 매일순교자가 나왔고, 한 집안에 순교자 한 명쯤 있는 것은 일상이었을 정도로 심한 핍박이 있었습니다.오늘날은 특정 국가와 민족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받는 핍박의 양상이달라졌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범 국가적으로, 정책적으로 핍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의 고난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고난외에 어떤 고난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뜻합니다. 5절의 말씀을 다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에게 위로가 넘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넘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에게는 위로가 넘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다는 말씀은 무슨뜻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때문에 우리에게 흘러 넘치는 은혜, 혜택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이 혜택에 대해서 제가 설교 초두에 언급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제 1문의 답에서 이와 같이 선포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몸과영혼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①나의 몸과 영혼은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②그리스도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셨습니다. ③그리스도는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풀어주셨습니다. 또한 ④그리스도는 나를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⑤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내 머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도 떨어지지 않습니다.참으로 모든 것은 나의 구원을 위해 합력하여 일합니다. 그리고 ⑥그리스도는 성령님을통해 내게 영생을 보증해 주십니다. 또한 ⑦그리스도는 이제부터 진심으로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나를준비시키십니다.”

    7가지 포인트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나는 그리스도의 소유, ②그리스도의 대속, ③그리스도는마귀를 이기심, ④그리스도의 보호하심, ⑤성부하나님의 작정,⑥성령님의 영생에 대한 보증, ⑦그리스도께 헌신의 마음을 수여.

    그리고 이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위로 안에서 복을 누리며 살다가 죽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만합니까?”이에 이렇게 답을 줍니다. “다음 세가지를 알아야만 합니다.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 어떻게 내가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구원받는지 알아야 합니다. 셋째, 어떻게 내가 그러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나의 죄인됨과 비참함에 대한 인식, ②구원에 이르는 믿음, ③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결론적으로, 성경이말씀하시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참된 위로는, 세상이 주는 위로와는 다릅니다. 신자에게 주어지는 유일하고도 최고의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소유한어떤 값진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위로에 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 이론가가 되지 맙시다! 생각 따로, 입술 따로,행동 따로 하는 이율 배반가가 되지 맙시다. 이 세상의 유일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 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보다 더한 위로가 있을까요? 하나님이신 분이 한낱 미물인 나의 죄를 위해서,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셨다는 것은, 그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죄를 속할 수 있는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한 믿음이 주어지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멸망의불구덩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입니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크고 완전한 위로가 있습니까?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주님의 위로는 십자가의 보혈로이루신 완전하고도 유일한 위로입니다. 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길은,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9/4/2016 6:20: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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