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Kingship 15: 다윗과 시므이와 바르실래 2(삼하16:5-14, 17:27-29, 19:16-23, 19:31-40, 2016년 8월 21일 주일)

Kingship 15: 다윗과 시므이와 바르실래 2(삼하16:5-14, 17:27-29, 19:16-23, 19:31-40, 2016년 8월 21일 주일)

 

저번 시간에 이어 오늘은 세 번째 본문과 네 번째 본문으로 설교하겠습니다. 이제 압살롬의 반역이 완전히 제압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요단강 동쪽에 있는 마하나임의 피신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복귀하기 위해서 요단강에 다다랐습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때 오늘 세 번째 본문 시작, 16절은, “바후림에 사는 베냐민 사람으로 게라의 아들인 시므이도 급히 와서…”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17절은, 시므이가 요단 강을 건너서, 왕 앞으로 나아 왔다라고 기록합니다. 지금 시므이는 왜 이와 같이 행동하고 있을까요? 왜 이리도 급히 와서, 요단강을 건너기까지 하면서 왕에게 나아갔을까요? 그의 심리 상태는 어떨까요? 우리는 저번 시간 시므이가 다윗 왕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합니다. 그는 피신길에 오른 다윗왕에게 저주를 퍼붓었습니다. 이제 왕이 복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불안했을 것입니다. 처벌받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분명히 이제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마음으로 다윗 왕을 마중하러 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급히”(16절) 왔다고 기록합니다. 뭔가 왕께 잘 보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므이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행동이지요. 그리고 급히 서둘러서 그 누구보다 먼저 왕 앞에 당도하려고 했고, 시므이는 요단강 서쪽 건너편에서 왕이 건너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다윗 왕이 와 있는 강을 먼저 건너가서 맞이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타이밍에 강을 건너서 다윗 왕에게 나아온 또 다른 한 사람을 시므이와 한 구절에서 언급합니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도 같이 요단강을 건너서 다윗 왕께 나아왔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17절). 지난 번 므비보셋과 시바의 이야기를 설교할 때, 우리는 시바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앞날의 출세를 위해서, 자신이 모시던 주인 므비보셋을 교묘히 속이고, 다윗에게는 거짓으로 므비보셋을 마치 다윗을 반대하는 인물로 폄하하여 보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이 복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다윗 왕께 나아갑니다. 말하자면 시므이도, 시바도 같은 부류라는 것이지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들입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기생충 같은 인간형들입니다. 이들은 강한 자 앞에서는 쩔쩔매고, 약한 자 앞에서는 기고 만장하는 못난 인간들이면서, 자신들에게 위험이 닥치려는 조짐이 보이면, 민첩하게 행동하고 자신의 허리를 굽혀서라도 상대방에게 환심을 사려는 약싹 빠른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지요. “그들은 왕의 가족이 강을 건너는 일을 도와서, 왕의 환심을 사려고, 나룻배로 건너갔다.”(18절). 그들이 수십 마일을 달려와서 요단강을 건너가서, 왕이 강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도우려고 했던 핵심적인 이유는 “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 왕에게 나아갈 때 혼자 가지 않고,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을 총동원해서 왕의 행차에 걸맞게 예우를 갖추는 퍼포먼스도 합니다. 시므이는 베냐민 사람 1,000명을 거느리고 갔고, 시바는 아들 열 다섯 명과 종 스무 명, 도합 서른 다섯 명을 데리고 갑니다.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충성심의 표현이죠. 결국 충성심으로 환심을 사려는 속 마음입니다. 시므이와 시바는 이렇게 해서라도 받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용서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시므이는 다윗 왕 앞에 엎드리면서 사죄를 빕니다. “임금님, 이 종의 허물을 마음에 두지 말아 주십시오. 높으신 임금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떠나시던 날, 제가 저지른 죄악을, 임금님께서는 기억하시거나 마음에 품지 말아 주십시오.”(19절).

죄인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 뿐입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 회개는 생명으로 나아가는 관문입니다. 회개없이는 용서가 없고, 용서가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죄사함이 없다는 것은 영원한 형벌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가지고서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전조현상,” 즉, 징후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고린도후서 7장에서 밝히기를 “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의 범죄함을 책망했을 때, 나타났던 현상은 “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7장에만 ‘근심’이라는 단어를 8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가 생각나기 시작하면서 회개 하기까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근심’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근심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7:10a)과 “세상 근심”(고후7:10b)입니다. 그런데 이 두 근심의 차이는 완전히 반대의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고후7:10)이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고후7:10).

 

그럼 우리는 이제 이 사도바울의 말씀을 가지고, 시므이를 판단하면 좋겠습니다. 지금 시므이는 어떤 종류의 근심에 차서 다윗 왕께 간청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결국 회개를 이루는 근심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일을 후회하는 정도의 세상 근심일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시므이는, “세상 근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근거로 저는 사도 바울의 근심에 대한 설명을 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는 일곱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다같이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이 근심은 여러분에게 ①간절함과 ②자신에 대한 해명과 ③정의의 분노와 ④하나님을 두려워함과 ⑤그리워함과 ⑥열심과 ⑦죄 지은 사람을 처벌할 마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현대인의성경, 고후7:11).

 

①“간절함”은 자신이 용서받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간절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②“자신에 대한 해명”은 변명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비참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③“정의의 분노”는 죄에 대한 분노, 죄에 대한 저항감입니다. ④“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심판주 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⑤“그리워함”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모함입니다. ⑥“열심”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열심입니다. ⑦“죄 지은 사람을 처벌할 마음”은 죄에 대한 댓가, 징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지금 시므이의 후회하는 행동과 근심에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7가지 회개의 특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정의의 분노나 처벌 받아 마땅하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 부은 왕을 저주해서 율법(출22:28, 전10:20)을 어긴 것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어떤 흔적도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시므이는 그저 다윗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바로 제가 죄를 지은 줄을, 이 종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오늘 요셉 지파의 모든 사람 가운데서 맨 먼저 높으신 임금님을 맞으러 내려왔습니다.”(20절). 무슨 말입니까? 내가 잘 못해서 양심에 찔려서, 임금님을 마중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가장 먼저 달려 온 것 아닙니까? 자신의 행동이 그나마 용서받을 만한 자세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자기 해명과 자기 열심을 보여서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동을 정상 참작해 달라는 것이지요.

마치 이런 것입니다. 아빠가 일찍 퇴근해서 놀아주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날따라 약속을 어기고 늦게 집에 돌아옵니다. 아이들은 이미 아빠에게 토라졌습니다. 그때 아빠는 미안한 마음에 아이스크림을 내밀면서, 얘들아 화 풀어! 아빠가 잘 못한 대가로 아이스크림 사 왔잖아! 그러니 아빠 용서해 줄 수 있지? 시므이가 마치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많은 변명 거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는 더 이상의 핑계를 댈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이상 내 속에는 용서를 구해야 하는 대상 앞에서, 설득이나 납득이 될만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 나에게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구나! 나는 결국 이대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구나!””아 나는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구나,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 줄 수 있을까?”라고 하면서 비탄해 하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구원을 이룰 만한 능력도 자격도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주님을 따를 만한, 주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나를 감싸지 않고서는 회생 불가능한 상태이며, 영원한 죽음에 문턱에서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 한낱 미물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야만 용서를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의 지고한 은혜가 아니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값지고 무게 있는 구원의 서정에서 나타나는 회개가 어떻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요? 평생 큰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살다가, 교회 다니면 마음이 편하니까, 천국 간다고 하니까, 눈 지그시 감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한마디 읊조린다고 그것이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회개입니까? 그것은 시므이가 하는 기회주의자의 처세술과 다를 바 없지요.

시므이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약삭빠른 기회주의자처럼 연기하고 있다는 두 번째 근거는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왕의 환심을 사려고”(18절)라고 기록합니다. 환심을 사기 위해서 시므이는 진심이 없는 세상적인 후회와 근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챈 다윗은 아비새가 시므이를 사형시켜야 된다고 할 때, 이렇게 답했던 것입니다. “…내가 오늘에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 같은데, 이런 날에,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처형을 받아서야 되겠느냐?”(22절). 다윗이 시므이를 처형하면 안 된다는 이유를 설명하길, “내가 시므이를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라, 왕위가 다시 복귀되는 첫날, 이런 경사스런 날에 어찌 처형식을 해서 이 날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환심을 사려고 자신의 입바른 소리로 설득하려는 시므이를 보고 당장 죽이고 싶지만, 잔칫날의 분위기를 위해서 참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에게 “너는 처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3절)이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시므이가 너가 처세술로 나의 환심을 사려고 하느냐? 그러면 나도 정치적 처세술로 베냐민 사람들의 환심을 사겠다”라는 다윗의 지략이 담겨 있습니다. 시므이는 지금 1,000명의 베냐민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다윗은 이제 통일 왕국을 기틀을 마련하는데, 사울 왕가의 정치적 텃밭이자 고향인 베냐민 지파를 끌어 안지 않고서는 힘듭니다. 이런 마당에 시므이를 처단하면 베냐민 사람들은 영영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용서”를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용서했기 때문에 처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다윗의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왕상2장). 그래서 결국 솔로몬에 의해서 시므이는 처형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거짓된 후회와 세상 근심으로 회개하는 것 같이 행동한 시므이의 말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의 중요한 메커니즘을 보게 됩니다. 복음은 선물입니다. 공짜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의 은혜의 수혜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근심의 회개를 이루어야 가능합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는 복음의 수혜자가 아닌 것입니다. 정말 참 복음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반드시 진정한 회개를 수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본문으로 가면, 바르실래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됩니다. 31절은 “그 때에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도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왕이 요단강을 건너는 일을 도우려고, 요단강가에 이르렀다”라고 기록합니다. 지금 왕의 복위하는 행차에 이런 저런 인간 군상들이 몰려드는데, 그 사람들의 목적은 한결 같이, “왕이 요단강을 건너는데 돕기 위해”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시므이나 시바 같은 자기 앞날을 도모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바르실래 같은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르실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르실래는 아주 늙은 사람으로, 나이가 여든 살이나 되었다. 그는 큰 부자였으므로, 왕이 마하나님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왕에게 음식을 공급하였다”(32절). 우리는 기억합니다. 몇 주전 시바에 대한 설교 때, 시바 역시 피신 길에 오른 다윗 왕에게, 수많은 음식을 가지고 나타났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시바가 그때 음식을 가져왔던 것과 또한 오늘 다윗 왕의 복위 길에 맞으러 나온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출세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왕께 베풀었으니, 왕도 나에게 호의로 갚겠지라는 기대와 계산을 가지고 한 처세술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르실래가 음식으로 다윗 왕을 공궤한 것은 처세술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오늘 대화에서 나타납니다.

다윗이 그럽니다. “노인께서는 나와 함께 건너가시지요. 나와 같이 가시면 내가 잘 대접하겠습니다”(33절). 아마 시므이나 시바 같은 인간 군상들은, 이런 경우 백이면 백, “네 임금님 감사합니다.”하고 왕의 호의를 받아 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실래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 나이가 지금 여든입니다. 제가 이 나이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어떻게 가릴 줄 알겠습니까? 이 종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신들, 그 맛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노래하는 남녀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들, 제가 이 나이에 잘 알아듣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 종이 높으신 임금님께 다시 짐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종은 임금님을 모시고 요단강을 건너려는 것 뿐인데, 어찌하여 임금님께서는 이러한 상을 저에게 베푸시려고 하십니까?”(35-36절). 얼마나 동양적인 냄새가 나는 말입니까? 서양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바르실래의 이 말의 그 느낌을 알 수 있을까 싶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서 상대방의 호의를 지혜롭게 거절하는 동양인들만의 방식이지요.

거절의 미덕이 무엇인지 정말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르실래가 정말 아름다운 인품의 소유자인 것은, 그가 베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바르실래 만큼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잘 보여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헤세드”(은혜)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분량대로은혜를주셨나니”(엡4:7). “너희는 그 은혜에의하여믿음으로말미암아구원을받았으니이것은너희에게서난것이아니요하나님의선물이라”(엡2:8). 은혜라는 단어는 일방통행일 때 성립하는 단어입니다.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성탄절 이브 때 하는 선물교환이 아닙니다. 그냥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것입니다. 다시 되돌려 받을 계획을 가지고 선물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어떤 보상을 바라고 선물을 수여하지 않습니다. 그저 어떤 사람이 그 선물을 받는 것으로 최고의 의미를 두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되돌려 받을 생각을 갖지 않고 그저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은혜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고 바울이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고상하고 존귀한 이유는, 자신의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십자가에 내어 줌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예수 그리스도는 힘이 없어서, 십자가 형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스스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때 “내어주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파라디도미(παραδδωμι)입니다. “파라디도미”는 “모든 힘과 권리와 생명까지 완전히 차압당하고 빼앗겨버리기 위해서, 자신을 항복시키고, 맡기며 포기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보다 더 큰 자기포기가 있을까요? 하나님으로서의 권세와 힘과 영광까지도 스스로 다 내어 주시면서까지 고통 속으로 자신을 내모는 극한의 헌신이죠. 이것을 두고 성경은 ‘파라디도미’내어주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인간 군상들 중에 얼마나 얄팍한 선의와 호의를 베풀면서, 자신을 치켜세우려는 사람이 많습니까? 자신의 지갑을 열어 백 불짜리 지폐를 몇 장 “내어주면서”마치 그것이 “파라디도미!”자신의 가진 것의 모든 것을 주는 것 마냥 우쭐대고, 자신의 선행은 은혜 받아서 그저 베푸는 것이라고 포장하는 인간 군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파라디도미”하실 때에는 그 어떤 대가도 보상도 기대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은혜는, 죄인된 우리가 도무지 갚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훌륭해져도 돌려드릴 수 없는 크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의 희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갚아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8/21/2016 5:53: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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