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hip14: 다윗과 시므이와 바르실래 1(삼하16:5-14,17:27-29,19:16-23,19:31-40,2016년8월14일 주일)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이번 주와다음 주 두번으로 나누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 다윗이 피신하는 동안 만났던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저번 시간 다리를 절게 된 므비보셋과 그의 종 시바의 이야기를 통해서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시므이와 바르실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보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왜 다윗의 인생에 별로중요하지 않은, 그야말로 반짝하고 스쳐지나 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할까요? 좀더 정확한 질문을 하자면, 왜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에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할까요?좀 더 나아가서,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에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는걸까요? 이런 질문들을 가지고 오늘본문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가 본문을 네 군데를 선택했는데요.첫 번째와 세 번째 본문은 시므이와 관련한 본문이고, 두 번째와 네 번째 본문은바르실래와 관련한 본문입니다. 먼저 시므이부터 봅시다.
본문 삼하16장 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윗왕이 바후림 마을에가까이 이르렀을 때에”바후림은 이미 삼하3장에서 한번 언급된 곳입니다.큐티하면서 성경을 꼼꼼히 읽으시는 분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기억력이 좋으신분은 바후림이 가지고 있는 사연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사연을 대략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남북을 통일하려고 할 때, 아브넬이 언약을 맺자고 청합니다. 그때 다윗이 내건 조건은 이전 아내였던 사울의 딸 미갈을 다시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미갈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었습니다. 미갈은 발디엘이라는 사람과 살고 있었습니다.이제 남북이 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서 발디엘에게서 미갈을 뺏어 오게합니다. 그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오매, 그의 남편이 그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왔더니 아브넬이 그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삼하3:15-16). 행복하게 살던 발디엘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왕명이 내려지고,아내를 빼앗겨서 울면서 계속 따라가다가 더 이상 따라오지 마라는 명령을 받고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던 곳,바후림. 발디엘이라는 한 개인에게 바후림은 어쩌면 다시 쳐다보기도 싫은 슬픈 사연이담긴 곳이자, 가정파탄의 종지부를 찍은 곳이며, 발디엘이 마음이 부서지고굴욕 당한 곳이며, 다윗이 원수같이 생각될, 평생 잊지 못할 장소였을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땅이며, 사울의 친인척들이모여 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사울가의 사람들은 다윗을 향한 울분과 분노가 있었습니다.그들은 사울의 나라를 다윗이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바후림에서발디엘에게서 일어났던 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어쩌면 원수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이 피신생활을 시작하면서 가다보니 바후림을 지나갑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울 집안 사람 중 시므이라는사람이 다윗의 피신 행렬에 나옵니다. 그러고는 다윗에게 줄곧 저주를 퍼붓습니다. 심지어 돌까지 던집니다. 저주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네가사울의 집안 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님께서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님께서 이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 주셨다.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재앙이다.”(7-8절).시므이는 그가 저주하면서 하나님을 끌어 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윗이 비록 피신을하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의 호위 무사들과 군사들이 따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명령만 내리면 즉결 처단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호위 장수였던 아비새가 다윗에게청합니다. “죽은 개가 높으신 임금님을 저주하는데, 어찌하여 그냥 보고만계십니까? 제가 당장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잘라 버리겠습니다.”(9절).이때 다윗은 특이한 대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그가 나를 저주한다고, 누가 그를 나무할 수 있겠느냐?”(10절). 그리고 이어서 모든 신하에게 한번 더 말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키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11절). 다윗은 지금 두 번씩이나 말하길, 시므이가 그렇게하는 것은 다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신학적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윗이 지금 시므이의 저주가 하나님께서시키셔서 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주어서 그렇게 하셨다라는 뜻이 아닙니다.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한 “뉘우침”의 의미로 하나님께서 분부하셔서 저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 내용을다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므이의 저주의 내용에는 사실과 다른 비논리적인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예를 들면, 다윗이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할 때 다윗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다윗은 지금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왕으로서 일개 평민의 저주를 듣는 것에 분노할 수 도 있었지만, 내가 이렇게 까지 된 것은,밧세바를 범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살인교사로 죽이고 했던 범죄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17장,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하는 율법의 명령을 어기면서 생겨나게 된, 수많은 이복 자녀들 사이에서 나타난 암투의 결과로 압살롬이라는인물도 생겨나게 되었고, 그 모든 원인은 다윗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하는 뉘우침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시므이에게 다윗왕을 저주하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두 번씩이나 명령합니다.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출22:28).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라”(전10:20).하나님께서 시므이에게 그렇게 시켜서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므이의그 저주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의 잘 못된 저주의 내용에도 불구하고,그것을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질타하시는 소리로 듣는 것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7:14).다윗은 시므이의 말을 “사람의 매”로 인식하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매”를 통해신자를 깨닫게 하십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제가 뭔가잘 못하고 있을 때, 저의 주변 사람이나 또는 전혀 처음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도 깨닫게 하십니다.이것은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인생의 퍼즐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특히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신자의 인생에 정말 중요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퍼즐입니다. 퍼즐은 그림 한 조각으로는 그림이 완성될 수 없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교회의 한 그림 조각인한 지체와 또 다른 그림 조각인 다른 지체를 엮고 엮어서 그림을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약교회의청사진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절대로 혼자서는 안되고,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고결합되어서 각 지체의 기능대로 역사하여,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그 몸이 비로소 자란다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혼자서 절대로 완전하지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목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혼자서 아무리능력있고 똑똑해도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시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그 이야기를 듣게 하심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어떤 때는 저에게 격려하는 사람을 보내서굉장히 위로해서 힘이 나게도 하십니다. 어떤 때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보내서 목회적인 힘을 얻게하십니다. 어떤 때는 제가 뭔가 목회를 잘 못할 때, 목사로서 미처보지 못하거나, 잘못 된 방향으로 갈 때, 질타하는 목소리를 듣게도하십니다. 사실 이게 제일 부담스럽고 싫습니다. 어느 누가 자기에게부정적인 소리를 하는 걸 기뻐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확신하는 게 있습니다. 퍼즐은 A라는 그림 조각이 B라는 그림 조각에게도 필요하지만,뒤 짚어서 B라는 그림조각이 없으면 A 그림조각 역시 소용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서로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교인들이 제게 찾아와 목회적인조언을 하곤 합니다. 그 중에는 굉장히 상쾌한 이야기도 있지만, 맘에짐이 되거나 심지어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힘든 얘기를 합니다.그리고 심지어 얼굴을 다시 보기도 힘들 정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참고하나님의 퍼즐 조각들을 인정하면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수용하려고 해 봅니다. 그러고 나면 놀라울 정도로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든 조언의 말들이 나를발전시키고, 교회에 더 유익이 되게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또한그런 조언을 한 교인 자신에게도 변화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자신을 더 겸손히 살피게 됩니다.그리고 목사와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결국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사람의매”입니다. 목사에게 누군가 “매를 들고 쫓아와서 한 바탕 부정적인 말을 쏟아 붓고" 가면, 목사에게 그것이 사람의 매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매”를 들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는 도리어 목사가 그 사람에게 “매”로 작용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의 매”는 우리가 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든 것이지요. 다만 우리는 사도 바울의 메시지처럼,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았을 뿐이지요. 그래서 더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게 하는 것이지요.
시므이의 비 논리적이고 잘 못된저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다윗에게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의 매”가 되었고, 반대로 시므이 본인에게도 분명히 “사람의매”로 돌려 받게 됩니다. 이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 볼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마지막에 이런 말을합니다. “혹시 주님께서 나의 이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오늘 시므이가한 저주 대신에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12절). 좋은 것”은 넓게 보면 “왕권의 회복”이며, 좁게는 피난 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도움이 바르실래라는 사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 바르실래의 이야기가 두 번째본문인 삼하 17장에서 짧게 기록합니다. 성경은 다윗이 마하나임에 다다랐을때,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지역으로부터 찾아왔다고 소개합니다. 그 중에한 사람이 오늘 살펴볼 바르실래입니다. 지금 피신생활을 하는 다윗과 그의 무리들의 상태는 어떨까요?다윗 성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마하나임까지는 직선거리로 최소한 30마일이 넘습니다.그렇다면 실제 이동거리는 거의 50마일이 될 것입니다. 척박한 광야 길 50마일을 걸어서 마하나임까지 도착했을 때, 그들은 보나마나 배고프고 피곤했을 것입니다. 이때 바르실래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수많은 먹거리를 가지고 옵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세 구절을 할애해서 적었는데,2/3인 두 구절을 바르실래가 가져온 음식의 이름으로 꽉 채웁니다. “…밀,보리, 밀가루, 볶은 곡식, 콩, 팥, 볶은 씨, 꿀, 버터, 양고기, 치즈…”(28-29절). 성경이 왜 이토록 식당의 메뉴판처럼음식 이름을 쭉 나열했을까요? 그것은 분명히 그 사랑하는 자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세심하고큰 지를 그렇게 표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원초적인 본능의 욕구를해결하지 못할 때 가장 힘들어 합니다. 그 중에 가장 봉우리에 해당 되는 것이 바로 식욕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 마귀가 가장 먼저 시험한 것이 바로 돌덩이를떡덩이로 만들어 봐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가장 먼저 불평불만을 쏟아 냈던 것이바로 먹는 문제였습니다. 지금 다윗은 이 본능의 욕구를 해결해야 만 합니다. 그러나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냥 배고픔을 참거나 그러다 굶어 죽든지,아니면 수하의 병사들을 시켜서 노략질을 해 오든지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의 쫓김을 받을 때, 비록 이방인들이긴 했지만 노략질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연명했습니다. 그는 지금 이제 자신의동족이자 다스리던 이스라엘 지역에서 노략질을 해서 8계명과 9계명을어겨서라도 노략질을 해서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굶을 것인지 결정해야 만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바르실래를 통하여 그럴 필요가 없도록 만드십니다. 만약 바르실래가 만나지 않았다면,다윗은 또 한번 하나님께 계명을 어겨야 하는 죄를 범했을 것입니다.
만약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원초적이고본능적인 것이 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는 피폐해 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자랑이 그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요1서2:16). 그래서 아굴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다윗은 왕의 식탁을 매일 매일대하다가, 피신길에 오르면서 그 모든 것이 중단되었습니다. 더 이상산해진미를 맛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가 왕궁에서 맛있는 것으로 너무 배부를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배가 고프니하나님께 도우심을 바라고 겸손하게 되었구나”그리고 더 많이 배고플 즈음에 처음 보는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먹이시고 입히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너무 너무 배가 고파서,혹 병사들을 시켜서 노략질이라도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하나님은 적절한 타이밍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 속에 들어가서,“사람의 매”를 맞기도 하고, “인생 채찍”으로 피신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 속에서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낙심이 되지만, 완전히 쓰러지지 않게 하시고, 힘든 지경에 있지만, 완전히 포기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의 피신 생활에 임합니다.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죽으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해서, 우리의소망이 꺼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생명이 되어서, 우리의 육신 가운데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죽을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었고,부활의 소망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의 부함과 가난함으로 방해받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가 낙심되는 상황을 만나도, 여전히 우리에게는유일한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