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hip13: 다윗과 므비보셋(삼하4:4, 9:1-13, 16:1-4,19:24-30, 2016년7월31일 주일)
오늘은 본문을 네 군데를 읽었습니다. 이 네 개의 본문은 각각 동떨어진 본문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각각의 본문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본문에 의도하신 바를 살펴봅시다.
삼하4장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왕이 죽는 장면입니다. 이스보셋의 죽는 이야기 사이에 이야기 흐름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한 가지 사실을 성경은 독자들에게 살짝 알려줍니다.“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4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지금 알려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사울 집안에 왕의 계보를 이을 수 있는 핏줄이 한 명 살아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로 본문 앞장 삼하 3장에서두 번씩이나 언급했던 사울 집안과 다윗 집안 사이의 상황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이스보셋이 죽음으로 사울의 집안이 완전히 몰락한 것이 아니라, 그나마 사울 집안의후손이 한 명 살아 있으니, 그가 앞으로 다윗과 사이에서 어떻게 되는지 보라!”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사울의 집안에 마지막 남은 한 사람마저 몰락시켜서 사울의 가문을 완전히 문닫게 하시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울의 마지막 남은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가 끝까지 은혜가운데살 것인지를 한번 지켜보라는 성경의 언급입니다.
므비보셋은 이스보셋의 친 조카이자, 요나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절뚝발이였는데, 그렇게 된 이유는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이 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므비보셋의 유모가 급히 아이를 안고 도망치다가 그만 떨어뜨려서 그리 됐습니다. 이날 얼마나 크게 다쳤든지 한 다리도 아니고 두 다리가 장애를 입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이것을 강조하듯이 다시 언급합니다(삼하9:13). 이렇듯 성경은 삼하 4장에서 1번, 삼하 9장에서 2번, 총 세 번을 므비보셋이 절뚝발이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이 이렇게까지 여러 번에 걸쳐서 므비보셋을 절뚝발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므비보셋이사울 가문의 대를 이어서 다윗의 집안과 상대할 수 있는 신체적 상황이 못된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개인에게 불행처럼 보이는 이 일이 꼭 불행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므비보셋이 만약 장애자가 아닌 건장한 사람으로 살아있었다면 그는 언제든지 제거 대상이 되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제거를 지시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마도 지나친 충성심과 야망에 불타는 요압이 독단적으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라엘 남북통일의 중요한 역할을 하려고 했던 아브넬도 개인사 때문에 죽인 요압 장군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므비보셋은 자신의 신체적 장애로 인해 정치적 견제를 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삼하 9장은 이제 다윗이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을 이루고,하나님이 언약궤도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그리고 주변 이방 나라들 중 대부분을 평정하고, 이제 왕국의 평화의 기틀을 마련 해 놓고 난 직후의 내용입니다. 이때 다윗은 요나단과 했던 언약이 생각납니다. 삼상 20장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이 사울의 위협에서 도망치도록 돕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헤어지면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삼상20:15)—“여호와께서 너의 모든 원수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신 다음에도 내 가족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현대인의 성경).다윗은 요나단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제 정말 요나단의 말처럼,하나님이 다윗의 대적을 다 멸하시고 다윗의 시대가 왔습니다. 이때 다윗은 요나단과의언약을 기억하고,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있느냐….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1절). 그랬더니신하들이 수소문을 해서 사울 집안의 신하 하나를 다윗 앞에 데리고 오는데 그의 이름이 시바였습니다(2절).다윗은 시바에게 또 묻습니다.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3절). 다윗은 두번씩이나 “은총”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단어로 חֶ סֶ ד(헤세드)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은혜, 은총, 자비, 긍휼”이라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가문에 혹시 남은 핏줄이 있으면 그에게 ‘헤세드’(은혜)를 베풀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1절에서 그렇게 언급하지요.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앞서 말씀 드린 바 대로 요나단과의 언약 때문에 은혜를 베풀기로 맘을 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언약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그 언약이 뭡니까?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창17:4).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여기에서 하나님은 언약의 수혜자를 두 부류로 명시합니다. “너” 아브라함과 “네 후손”, 즉 후대의 모든 자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까지 언약의 수혜자로 명단을 올립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100년 전에 중동사람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아브라함과 피 한 방울 않섞인 오늘날 저와 여러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그것을 시원하게 설명해 줍니다. 갈3:7-9절을 다 함께 읽어 봅시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태어날 모든 세대의 이방인들—한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할 것 없이 모두—을 믿음으로 의인되게 할 것을 미리 알고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신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4,000여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근거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받을 만한 자격 조건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전혀 자격이 안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근거해서 신실하게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마치 자격이 있는 것처럼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시고, 의인되게 하셨습니다. 그 근거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셔서,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고, 자격도 없지만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하나님이 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지게 하셨나요? 그것은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하나님은 언약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에 근거하는 것이지요. 약속이 없으면 은혜도 없는 것입니다. 약속하셨기에 사람은 계속 배반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끝까지 “내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을 봅시다. 이제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살아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를 데려오게 합니다. 므비보셋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윗 앞에 옵니다. 다윗 성으로 오는 도중 므비보셋은 벼라 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처형 당할지도 몰라. 아니면 멀리 유배 당해서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므비보셋은 다윗 앞에 오자마자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6절)라고 합니다. 자신도 왕의 가문의 왕자인데도, 다윗에게 자신을 종이라고 낮춥니다. 이때 다윗은 “무서워 말라.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찌니라”(7절). 다윗은 재산을 다 회복시켜 주고, 왕의 식탁에 항상 먹게 함으로써, 왕의 후손으로서의 명예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때 므비보셋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8절).
은혜가 주어질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내면의 변화는 “자신의 쓸모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므비보셋이 정확히 그것을 보여줍니다. 기독교 신자가 되는 가장 첫 걸음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식” 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죄인의 특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11, 18). 죄인이 계속 죄인으로 머무르다가 결국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이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왜요? 자기 의로 충분히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숨쉬는 것이 하나님이 호흡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인 것을 도무지 모릅니다. 자기가 운동 열심히 하고, 건강을 잘 돌봐서 그런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인생에게 불행을 주어서라도 깨닫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불행과 아픔을 주어서라도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므비보셋이 왜 “죽은 개 같은 나”라고 표현했을까요? 이것은 그냥 겸손의 표현이나 다윗에게 잘 보이려고 한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실제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세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정말 어쩌면 므비보셋은 자살 기도를 여러 번 했을 지도 모를 만큼,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이스라엘의 왕의 가문에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발을 절게 됩니다. 그래도 왕궁에서 지낼 수만 있다면 신체 장애쯤이야 극복할 수도 있을 건데, 할아버지 사울 왕도 죽고, 아버지 요나단과 그 삼촌들도 모두 죽습니다. 그 순간 므비보셋에게 드는 생각은 분명히 “죽은 개 같은 내 인생”이라고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쓸모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왕의 특별한 은총이 아니면, 굶어 죽을 수도 있는 비참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은혜가 찾아 온 것입니다.
잘 나가고 성공한 인생일수록 고난이 닥치면 자신의 비참함을 더 깊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려고 할 때, 고통과 고난을 겪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찾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 없는 인생은 이리도 비참하구나라는 사실을 보게 하십니다. 왜 그렇게 까지 하실까요? 인생은 무지하고 교만해서, 실패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얼마나 쓸모 없는 인생인지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무디고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인생을 꺾어서라도 인생의 주재권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은혜가 아니면 비참한 인생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죄인됨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한 가지 더 은혜를 베풉니다. 시바의 모든 식솔들이 므비보셋을 섬기게 합니다. 시바는 아마도 사울 왕의 중견 신하 정도로 보입니다. 그래서 시바에게 15아들과 20명의 종이 있는데(10절), 시바의 집 모든 사람들이 므비보셋의 종이 되게 합니다(12절). 아마도 시바가 므비보셋이 돌려받은 사울 왕의 모든 재산을 총괄하고 돌보는 책임자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흘러서 다윗의 왕궁에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고, 다윗은 급히 왕궁을 탈출합니다. 이제 다윗 왕의 도망자 생활이 삼하16장부터 그려집니다. 도망자 생활에 처음 만난 사람은 바로 므비보셋의 종 시바였습니다. 그런데 시바는 빈손으로 오지 않고, 풍성한 음식을 가지고 다윗을 맞이합니다(삼하16:1). 시바가 이렇게 까지 한 것은 분명히 무슨 속셈이 있는 듯 합니다. 압살롬이 쿠데타에 성공해서 왕이 되든지, 다윗이 다시 복귀하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일들을 해 놓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 다윗이 왕으로 복귀할 날을 대비하여, 잘 보일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므비보셋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시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는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제야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 할아버지의 나라를 자기에게 되돌려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새번역성경, 3절).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시바에게 말합니다. “므비보셋의 재산을 네가 모두 가져라”(새번역, 4절). 어쩌면 시바는 이 말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혹 복귀를 하더라도, 므비보셋에 대해서 계속 안 좋은 감정과 의심을 가질 것이기에, 그러면 실제로 므비보셋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신이 그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삼하19장에 보면, 이제 압살롬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가고,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복귀합니다. 이때 므비보셋은 다윗을 마중 나옵니다. 성경은 므비보셋의 행색을 묘사합니다. “그는, 왕이 떠나간 날부터 평안하게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발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옷도 빨아 입지 않았다”(새번역, 삼하19:24). 이런 모습으로 마중 나온 므비보셋에게 다윗이 묻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나와 함께 떠나지 않았느냐?”(25절). 므비보셋이 대답합니다. “높으신 임금님, 저는 다리를 절기 때문에, 나귀를 타고 임금님과 떠나려고, 제가 탈 나귀에 안장을 얹으라고 저의 종에게 일렀으나, 종이 그만 저를 속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임금님께 가서, 이 종을 모함까지 하였습니다. 임금님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은 분이시니, 임금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처분하시기를 바랍니다. 제 아버지의 온 집안은 임금에게 죽어도 마땅한 사람들뿐인데, 임금님께서는 이 종을 임금님의 상에서 먹는 사람들과 함께 먹도록 해주셨으니, 이제 저에게는 무슨 염치가 있다고 임금님께 무엇을 더 요구하겠습니까?”(새번역, 26-28절).
이제 다윗은 잠시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바의 말은 므비보셋이 사울의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했는데, 므비보셋은 시바가 거짓말을 하고 자기를 모함했다고 얘기합니다. 지금까지만 보면 두 사람 중에 누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인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묘수를 던집니다.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어 가져라”(29절). 이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다윗이 시바의 말을 듣고, 므비보셋의 재산을 다 가지라고 하고서, 번복할 수 없었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절충하는 선에서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어 가져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아더 핑크는 이 장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다윗의 제안은 마치 솔로몬의 판결과 같은 것인데,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데리고 와서 각자 자기의 아이라고 주장 할 때,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왕상3:25)고 해서 진짜 엄마를 가려 낸 지혜와 같다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이제 므비보셋의 말을 들어 보면, 누가 거짓말 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므비보셋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높으신 임금님께서 안전하게 왕궁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는데, 이제 그가 그 밭을 다 차지 한들 어떻습니까?”(새번역, 30절). 므비보셋의 진심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자기는 재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왕만 살아 돌아와서, 그 식탁에 앉아서 같이 식사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므비보셋 스토리는 여기에서 갑자기 끝이 나버립니다.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분명히 므비보셋은 마지막 그 말을 한 것으로 다윗의 신망을 더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확신이 들었습니다. 혹 므비보셋이 시바의 말처럼 정말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거나, 또한 마지막 다윗의 제안 “밭을 반으로 나누어 가져라”는 말에 분괴하면서 “어떻게 우리 집안의 재산을 저 따위 종과 나누어 가지라고 하십니까?”라고 따져 물었다고 했더라도 다윗은 므비보셋을 품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삼하 21:7에 나타납니다.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들 7명을 내놓으라고 다윗에게 요구하고, 그들을 처형하겠다고 할 때, 다윗은 므비보셋 만큼은 끝까지 지켜줍니다. 다윗은 시종 일관 므비보셋을 품어주고 아끼는 이유를, “요나단과의 언약”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므비보셋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은 것 때문에 신뢰가 생겨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다윗의 이유는 오직 한가지 “언약”을 했기에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지요. 이것이 복음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은, 우리가 예쁘고 어떤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창15:6, 롬4:3, 갈3:6, 약2:23)는 말씀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값없이 수여하신 “의” 곧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신 것이지요. 내가 믿어서, 내가 신앙고백을 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경의 진리가 이해가 다 되었고 그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고, 구원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지하여서 하나님의 진리를 도무지 깨닫지도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있었지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은혜를 베푸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다윗은 조건 없이 그저 언약했기에 므비보셋을 품어주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값없이 그저 주는 은혜, 우리가 값을 수 없는 그 은혜, 깊고 넓은 끝이 없는 은혜를 보여 줍니다.
성경은 그 이후 시바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시바를 처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전혀 기록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판단을 열어둠으로써 “은혜”가 무엇인지 더 부각시킵니다. 은혜는 받아야 할 처벌을 받지 않고, 자격이 없는 자에게 마치 자격이 있는 것처럼 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바를 처벌하지 않고, 므비보셋을 언약 때문에 끝까지 그를 왕의 식탁에서 먹을 수 있는 자격을 빼앗지 않고 지켜줍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