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hip 12: 하나님의 궤(삼하6:1-23, 대상15:1-29, 2016년7월24일 주일)
오늘 본문은 언약궤가 예루살렘 다윗 성으로 들어오는 본문입니다. 다윗이 남북을 통일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통일왕국의 왕이 되고 보니, 늘 마음에 걸렸던 하나님의 언약궤가 생각났습니다. 지금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이라고도 불리는 바알레유다라는 마을에 아비나답의 집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 있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 입성하는 것을 구상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절대로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일단 사람이 많이 동원 되야 한다는 구상을 첫 번째로 합니다. 1절 말씀에 보면,“삼만을 다시 모으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이‘다시’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볼 때, 30,000명이 최근까지 같이 모여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분명히 오늘 본문의 앞장 삼하5장의 블레셋과의 전투에 동원된 군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언약궤를 모셔오는 것을 위하여, 얼마 전까지도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던 삼만의 군인을 가장 핵심적인 행사인력으로 생각했다는 것은, 첫째, 언약궤가 있는 바알레유다라는 장소가 기럇여아림이라는 다른 이름인데, 이곳은 블레셋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접경 지역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둘째, 다윗이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그의 생각의 중심에는 군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시사해 줍니다. 어쩌면 언약궤를 모셔오는 행사에 군대만큼 멋져 보이고, 든든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동원한 인원은 marching band였습니다(5절). 수많은 악기로 구성된 행진하는 악대였습니다. 삼만명의 호위군인과 멋진 marching band가 언약궤를 앞세우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퍼레이드를 벌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일전에 대한민국 건군 65주년 국군의 날 기념 행사때, 군인들의 시가행진이 있었는데 TV로 보니 정말 멋졌습니다.그때 동원된 전체 군인의 수가 1만 2천명이라고합니다. 그런데 거의 세배가 되는 군인과 마칭 밴드를 동원한 다윗의 “언약궤 퍼레이드”가 얼마나 장관이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할 수 있는 힘을 다 써서,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날을 국가적인 잔치의 날로 기념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오는 방법은 “새 수레에 싣고”(3절)라고 밝힙니다. 소달구지에 실었다는 말입니다. 3,000년 전 소달구지는 제법 괜찮은 이동수단이라고 봐집니다. 오늘날 캐딜락 리무진이라고해도 될 것입니다. 그 수레는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몰았다 (3절)라고 했습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개역성경에서 아비나답의 ‘아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사실 아들이 아니라 ‘자손’으로 번역해야 더 합당합니다. 히브리어의 ‘벤’이라는 단어가 복수형이 될 때에는 ‘아들들’도 되지만 ‘자손’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상7장 1절을 보면 처음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를 때, 아들 엘리아살을시켜서 20년동안 돌보게 합니다. 이때는 아직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이고, 사울이 왕이 되기 전입니다. 또한 다윗이 태어나기도 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비나답의 집에 언약궤가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오늘 본문까지는 최소한 7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은 살아 있더라도 최소한 100살 전후가 되었을 것입니다.그런데 오늘 언약궤를 옮기는데 처음 궤를 돌보던 엘리아살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이미 죽었을 확률이 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웃사와 아효는 갑자기 등장한 이름인데, 이들이 아비나답의 아들이라면 그들 또한 100살 전후의 사람인데, 이들이 소 달구지를 몰고 언약궤를 옮겼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는 오늘 본에서도 보듯이 “산”입니다. 그곳은 해발 2,500피트나 되는데다, 거기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10마일이나 되는데, 이런 험준하고 먼 곳을 100살 전후의 늙은이가 몰고 간다는 것은 힘들겠죠. 뿐만 아니라 왕의 신분인 다윗도 70세까지 밖에 못살던 시절의 남자 평균 수명은 아마도 4-50대 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웃사와 아효는 아비나답의 아들들이 아니라, 손자 뻘 정도되는 사람이었을 것으로 봐 집니다. 그 만큼 언약궤가 아비나답의 집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효가 궤 앞쪽으로 서서 가고, 웃사도 궤 주변 어딘가에서 따르고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곤의 타작 마당을 지나갈 때에, 무슨 연유인지 달구지 끄는 소들이 뛰었습니다. 그때 실려 있던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려고 했습니다. 웃사가 그것을 보고 순발력 있게 손을 내밀어서 언약궤를 붙듭니다. 하마터면 언약궤가 땅에 곤두박질칠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순간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어버립니다(7절). 이 사건이 벌어지면서 잔치는 초상분위기로 돌변합니다. 수만 명의 퍼레이드 인력들은 멈춰섭니다. 다윗도 이것을 보고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궤를 도무지 옮길 수 없겠다라고 합니다 (9절). 그래서 더 이상 언약궤는 옮기지 못하고, 주변에 있던 오벧에돔의 집에 두고, 모두 철수 합니다. 제1차 언약궤 이송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제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충격에 휩싸여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뭐가 잘 못된 것일까? 다윗은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방법의 문제였습니다.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으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라는사실을 알게 됩니다. 동기와 열정은 좋았지만, 방법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핵심적인 방법상의 실수는 뭐였을까요? 역대상15장 13절에서 다윗은 그 이유를 밝힙니다.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여기서 “전에는”이라는 말은 제1차 언약궤 이송작전을 말합니다.이 제1차 언약궤 이송 작전의 실패 원인은 언약궤를 메지 않고, 소 달구지에 싣고 왔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한번 살펴봐야합니다.
먼저 언약궤가 처음 만들어질 때의 모양과 구조를 살펴봐야 합니다. 출25:12-15까지를 다 함께 읽어봅시다.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저편에 두 고리며,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빼어내지 말찌며”하나님이 언약궤를 만들라고 처음 명령하셨을 때, 그 언약궤에는 이동 할 때의 방법까지도 염두에두시고, 구조물을 달도록 하게 하십니다. 언약궤 상상도를 화면으로 한번보시면 잘 이해가 될 겁니다.
출25:14-15에는 언약궤에 고리 네개를 붙이고, 그 고리에 채(pole,대)를 끼우고, 절대로 이 대를 빼지 말고그대로 두라고 명령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동 방법에 대한 상기(reminder),기억신호 같은 것이지요. 남비에 손잡이 있는 것은 그것을 볼 때마다 여기를 잡고 옮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언약궤에 고리와 대를 빼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은 그것을 볼 때마다,이동수단은 이것을 잡고 메어가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14절에서 “궤를 메게 하며”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언약궤를만드실 때 구조물을 만드신 것은 어떤 목적과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를 남자의 몸으로 만드신 것은 남자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를 여자의 몸으로 만드신 것은 여자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배필이 되고,남자는 여자의 머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이고,만드신 처음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대로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지킬 때에 그 가정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이 언약궤를 이동할 때 주의 사항을 기록한 성경을 읽어봅시다. 민수기4장 15절,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찌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이동할때 주의 사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반드시 고핫 자손이 메야 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절대 만지지 말라는것입니다. 고핫은 레위의 둘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고핫이 아므람을 낳고,아므람이 아론과 모세를 낳지요. 고핫 자손들은 성소의 기구들 특히 언약궤를 멜 수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궤를 멜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었습니다. 만지면 죽기 때문입니다.
이제 답이 나왔습니다. 오늘 웃사가 죽은 이유는, 민4:15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언약궤를 만지면 죽는다고 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사건이 그냥 우연의 사건일까요? 그렇지 않겠지요?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분명히다윗과 그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뭘까요?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백성은 망한다”는 진리입니다.
그럼 왜 소달구지로 이동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처음 아비나답의 집에 언약궤가 도착할 때,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가 소달구지에 실려서 반환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소달구지에 싣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블레셋의 방법입니다. 그 이방민족의 방법을 그대로 다윗이 답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화면의 그림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소달구지에 실려 있는 언약궤 양 옆에 뭐가달려 있습니까? 절대 빼지 말라고 했던 ‘대’가 그대로 달려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보고도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아무도 상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언약궤 옆에 붙어 있는 것이 분명히,이동할 때 메는 손잡이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명령(출25장과 민수4장)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만 생각했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씀에 대한 지식과 순종이 부재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열정은 있는데, 방법이 하나님 말씀 중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그들은 말씀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들어오는것이 정말 기쁘고 즐거워 할 일이었는데, 정작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아이러니입니다. 신자가 자주 범하는 불신앙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하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말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왜 모를까요? 말씀을 주야로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말씀을 늘 대하지 않는데 무슨 수로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말씀을 늘 묵상하지 않고 배우지 않는 사람이 무슨 수로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윗의 치명적인 불신앙이 뭐였습니까? 말씀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여러분 저번 주 설교 시간에 우리는 신17장의 “왕의 규례”중 부정명령문으로 된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긍정명령문으로 된 마지막 한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한번 다같이 읽어봅시다.“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①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②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③지켜 행할 것이라”(신17:18-19). 다윗이 왕으로 지켜야 할 마지막 규례는 “성경을 평생 옆에 두고 읽고, 배우며,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이 왕의 규례를 잘 지켰다면, 오늘 이와 같은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말씀만 제대로 읽었다면, 어떻게 손잡이(채, pole) 달린 언약궤를 보고도, 그것이 반드시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고 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생각해 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말씀을 읽지 않았던 것입니다. 왕의 규례 제4번을 소홀히 하고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고, 결국 다윗과 그 모든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너희들은 망한다”라는 싸인입니다.
며칠 전 한국에 있는 후배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보다 신학교 8-9년 후배인데, 몇 달 전에 부산의 조그만 교회에담임목사로 청빙 받아서 목회를 하고 있는 분입니다. 전화를 건 이유는 한가지 교회 문제로 조언을 부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을 들어보니 이랬습니다. 전임 목사님이 교회를 은퇴하시고 교회가 퇴직금을 드리기로 했는데, 목사님이 너무 적다고 더 많은 금액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교회가 새 목사님도 오시고 했으니, 빨리 교회가 안정되고 새 출발을 해야한다는 명목하에, 요구하는 대로 들어 주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그 전임목사님이 맘이 바뀌어서 좀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저축해 놓은 재정은 있지만, 그 목사님의 요구대로 더 이상은 못해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해결이 안되면, 제 후배 목사의 위임식문제와 이미 사놓은 종교부지에서의 건축문제를 진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래서 교인들이 입을 모아서 변호사를 선임하고, 전임목사와 소송을 해서라도,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상황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고민이라고 제게 조언을 부탁했습니다. 나는 딱 한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소송 절대 하지말고, 그냥 기도하면서 기다려라!”그러면서 저는 교인끼리 소송을 하는것은, 성경 말씀을 어기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은 분명히 밝힙니다. 신자간에는 세상 법정에서 소송전을 하지 말라.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 후배목사에게 이 성경의 말씀을 모르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간단하지 않느냐? 그냥 말씀대로 하면 돼지, 무슨 고민을 그리하느냐?그랬더니, “그래도 교인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헌금한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말도안 되는 목사에게 허비할 수 있느냐?”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교인들이 아무리 교회의 헌금한 돈을 허비하지 않겠다는 좋은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불신앙이다.””사람이 보기에 그것이아무리 바른 길 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순간 그것은 이미 악한 것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위임식 좀 늦게 하면 어떠냐? 교회 건축 좀 늦게 하면 어떻느냐?하나님께 맡겨버리고 말씀대로 행하고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거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실수를 범합니다. “동기와 열정이 선하다고 해서,그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생각들이 그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서 행하는 그 어떤 열심과 헌신도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옆집에 사는 독거 할아버지에게 부침개를 해 드리려고, 남의 집 텃밭의 호박을 살짝 따다가 부침개를 부쳐드리면 그것이 잘한 일입니까? 동기가 선하다고 잘 못된 방법까지 정당화 되어서는 안됩니다.그런데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범하는 실수와 불신앙들은 크게 두 가지 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지키지 않는 경우와, 2.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경우입니다. 두 개 다 나쁜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후자입니다. 다윗은 신17장의 왕의 규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늘 옆에 두고 읽지 않고,배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지요.그러니 언약궤에 달린 손잡이를 보고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반드시 지켜야 할“하나님의 궤 운반 규정”이 있다는 것 조차 생각해 내지 못한 것입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법을 모르는데,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않으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해 주소서!”이런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교인들을 심방하거나 상담을 하다 보면 기도 부탁을 많이 받습니다. 대게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좀 하나님말씀대로 살도록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그런데 만약 이런 기도를 부탁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않고 모른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까?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말씀 위에서만 성립됩니다. 말씀 없이 어떻게 믿음이 생깁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은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자 이제 다윗이 제1차 언약궤 운반을 실패하고 난 후, 약 석 달이 지났을 때 한가지 소식을 듣습니다. 언약궤가 임시로 머무르고 있는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다시 모셔오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제2차 “언약궤 운반 시도”를 합니다. 다윗이 제2차 시도에서 어떻게 하는지 봅시다. 다윗은 이제 웃사의 죽음의 충격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합니다. 그 기록이 역대상 15장에 나옵니다. 다윗은 두 가지 사항을 철저하게 이행합니다. 1. 운반하는 사람입니다.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2절). 이 말씀대로 아론과 레위 자손들을 6개조로 120명씩, 도합 720명을 선발합니다(5-10절). 그리고 marching band 또한 레위 사람들중 노래하는 자와 악기 다루는 자들을 선발해서 세웁니다 (16-24절).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드디어 하나님의 궤가 다윗 성으로 입성합니다. 이때 다윗이 궤 앞에 서서 가면서 얼마나 기뻤든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삼하6:14)라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즐거움이 뭔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궤가 들어오는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그래서 왕임에도 불구하고 덩실덩실 힘을 다하여 춤을 췄습니다. “내가 왕이 아니라,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의 그런 행동을 보고 꾸짖습니다. “왕이 어찌 그리 체통머리가 없느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대답합니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 수도 있소”(22절).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든지 낮아 질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게 신자의 모습이지요. 말씀대로 살고, 말씀에 순종하는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을 항상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그리스도께서는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실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는 무죄하시고, 그는 완전하시며,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7). 그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십니다.
신자가 말씀에 순종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바로 자기부인이지요.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쓸모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고는 이제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도무지 살 수 없다는것을 깨닫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그 은혜로 살아가게 되지요. 그리고 그 은혜만 생각하면 정말 기쁘고 즐겁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나니, 언약궤가 들어올 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춤을 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었으면,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함으로 언약궤를 운반했고, 그에게는 자신을 낮추고 낮추어서,하나님을 왕으로 올려드리고,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도 순종하지도 못하는 사울 집안의 미갈은 다윗의 기쁨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거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절대로 평안이 없습니다.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아는데 늘 갈등하면서 지키지 못하는 신자에게는 늘 번민만 있을 뿐입니다. 말씀 안에서만 참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만 참 평안이 있습니다. 그냥 바보처럼 말씀대로 살아가세요. 그러면 신자의 삶은 다윗처럼 춤추는 삶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