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hip 9: 왕들의 전쟁(삼하2:1-3:1, 2016년7월3일 주일)
오늘 본문을 가지고 다음주와 두 번 나누어서 설교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서론만 하고 다음주에 본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 왕의 죽음 이후에 남과 북에 두 왕이 세워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죽었습니다. 이제 단순히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제 2대왕은 다윗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 아니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기 까지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전쟁에서 승리해서 북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블레셋을 몰아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땅을 원래대로 회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왕이 되기는 힘듭니다. 둘째, 사울 왕의 자식이 아직 한 명 살아 있습니다. 이스보셋이라는 사울의 친자식이 남아 있기에 이스라엘의 왕의 계보가 그리고 이양되게 되면, 다윗이 왕이 되더라도 정통성을 의심받게 됩니다. 셋째, 결국 사울의 계보를 끝내고 다윗 왕의 계보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해결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은 불 보듯 뻔하게 전쟁을 통해서 결판 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 여러 장에 걸쳐서, 사울의 집안과 다윗의 집안이 전쟁을 치르는 것으로 내용이 채워질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을 들여다 봅시다.
이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전멸시키다시피 한 후에 다윗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블레셋 땅에서 아기스 왕으로부터 선사받은 시글락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한 행동은 사울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기록자는 여호와께 묻지 않아서 죽었던 사울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일일이 묻고 행동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사울의 죽음 스토리 다음에 이어지는 첫 문장으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삼하2:1). 오늘 본문이 이렇게 시작한다는 사실은, 그 결말이 어떻게 될 지가 이미 결판났다라는 의미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주재권, 왕권을 인정하는 가장 기본은 하나님께 묻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고 행동하게 되면, 하나님이 일하심에 순종하고 지켜보겠다는 신앙고백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다음 스토리가 이어지는 삼하3장1절이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성경기자는 성령에 의해 천재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만듭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삼하3:1). 성경이 지금 보여주고 싶은 것은 간단히 말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일일이 물은 다윗의 집안은 점점 강하여 가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사울의 집안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결국 오늘 본문 1절은 다윗의 결말이 어떠할지를 미리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다윗이 지금 "여호와께 물어"라는 것의 핵심적인 의미는 뭘까요? 주재권입니다. 나의 가는 길은 내가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라는 대로 가겠습니다라는 다윗의 믿음의 표현이죠. 내가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라는 뜻이지요.
주재권이 뭡니까? 시쳇말로 "주제파악"을 잘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주제파악을 못했지요. 하나님이 왕인데,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했더니 말도 듣지 않고, 전리품을 남겼지요. 그리고 돌아오면서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까지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자신이 왕이죠. 하나님의 주재권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제파악"을 잘했지요. 내가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이란 뜻이지요. 그러므로 주재권은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라는 고백이지요.
여러분 한 집안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얼마나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불신앙으로 산 결과 그의 집안은 점점 망해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묻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던 다윗의 집안은 점점 흥해 갔습니다. 성경은 오늘날 한 집안의 흥망성쇠가 무엇에 달려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한 집안이 흥하거나 쇠하게 되는 것은 개인의 똑똑함이나 능력과 경험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개인과 가정과 나라의 흥망성쇠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며칠 전에 오렌지 카운티에 Veritas Classical Academy라는 한 크리스천 사립학교의 교장을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학교는 커리큘럼에 성경과 고전이 중요한 과목으로 채택 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학생의 상당수가 라틴어를 능수능란하게 합니다. 이런 특별한 기독교 학교를 유지하기까지 참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가장 큰 기도제목은, SB1146이라고 불리는 캘리포니아 자치법안이 상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교육차별금지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것이 만약 통과되면 보수적인 크리스천 스쿨들은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에 해당되는 학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1. 학교의 종교적 신념, 즉 성경의 가르침대로 학교의 학풍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아무나 입학생으로 받지 않는 학교 규정을 계속 고수하는 대신, 나라의 그 어떤 재정지원도 받지 않을 것인지? 아니면 2. 학교의 보수적인 규정을 없애고, 비신앙인도 입학생으로 받고, 졸업을 위해서 채플을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정책도 없애고, 성경이 금지하는 동성애 클럽이라든지 하는 것을 캠퍼스 내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등의 차별금지법에 동의하면서, 나라의 수많은 재정 혜택을 받을 것인지. 이것은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나도 가까이 있는 기독교 보수 종합대학인 바이올라 대학으로부터 얼마 전 총장이름으로 된 편지가, 제가 그 학교 동문이기에 기도해 달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내용이 바로 SB1146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바이올라 대학은 끝까지 학교의 biblical conviction(성경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동문들에게 펀드 레이징을 계속해서, 재학생들에게 변함없이 financial aid와 scholarship을 제공하겠다는 편지의 내용이었습니다.
크리스천 학교가 세상적인 법안을 거부하고, 대신 어려운 길을 걷기로 결정한 것 세상적으로 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 수 있습니까? 신자들 중에는 "고리타분한 믿음 VS 실리주의적인 믿음"을 얘기하면서, 실리주의적인 믿음을 많이 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대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내가 세상의 혜택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실리주의"라는 말과 절대로 혼용해서 쓰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의 길을 정의 할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7:13-14). 믿음의 길이라고 할 때, 예수님은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혹독한 댓가"를 치루지 않고서는 가기 힘든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보수적인 크리스천 학교들이 가면 갈수록 살아남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차별금지법을 시행하지 않는 학교들의 재학생들은 더 이상 주정부, 연방정부의 학자금보조나 지원정책에서 아예 제외되게 됩니다. 결국 나중엔 학자금 융자 내는 것도 어려워지게 될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 기독교교육기관이 살아 남기란 힘든 시대가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SB1146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다가 학교가 문을 닫을 위기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재정적인 어려움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세상의 요구를 거부하고, 스스로 혹독한 댓가를 치르면서까지 성경적인 신념을 지키려고 할까요? 그것은 복음이 그러하기 때문이지요. 복음은 정말 댓가 없이는 그 맛을 알 수가 없지요. 복음은 그저 공짜로 주어졌지만, 그것을 전하기까지는 그리고 그것이 믿음의 후손에게 전하여 지기 까지는 정말 수많은 희생과 댓가가 따랐지요. 조선땅의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자기 가족이 풍토병으로 죽고, 선교사 자신도 죽어가면서 전해준 복음때문에 우리가 지금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전해준 복음을 어떻게 지키고, 믿음의 후손들에게 전수할 수 있을까요? 댓가를 치르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복음은 받는 순간 그 자체로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고, 내가 손해 보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생각할 때, 나의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가까이 파사데나에 있는 풀러신학교의 리처드 마우 총장의 일화를 들었습니다. 그는 본래 침례교단의 신학교에서 봉사를 하다가, 이 학교로 왔습니다. 그는 본래 애연가라는 것입니다. 그 교단에서는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이곳 풀러로 와 보니, 학풍이나 신앙의 분위기가 담배를 피는 것은 굉장히 죄악시 하는 풍토이며, 복음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끊었다는 것입니다. 혹 한명이라도 자기때문에 상처가 될 까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떨 대는 담배가 너무 피고 싶은데, 한가지 상상을 하면서 위로를 받는답니다. 앞으로 주님앞에 갈 때, 주님이 자기를 맞이해 주시면서 그동안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담배 한대를 입에 물어 줄 것이라고....그런 농담을 수업시간에 했다는 것입니다. 복음때문에 신자가 불편을 감수하고, 손해를 봐야 하는 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믿음이요, 신앙 아닙니까? 그리고 이게 주재권을 인정하는 삶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불편을 감수하고, 혹독한 댓가를 치르면서, 하나님의 주재권 속에 들어가는 신자가 겪는 고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불신자가 너무 너무 돈도 잘 벌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삽니다. 그런데 신자는 이상하게도 예수님 잘 믿으려고만 하면 아프고 병들고 장사가 잘 안되고, 직장을 잃어야 되고…여러 가지 숱한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계속 고난이 닥칩니다. 그러면 정말 힘이 빠집니다. 다윗이 그렇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에게 유다 왕의 기름부음을 받고도, 공식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거의 수년 간 산으로 들로 쫓기는 방랑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사울은 오랫동안 왕좌를 지키며 득세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은 악인 득세하고 불신자가 잘 되는 것 처럼 허용하시는 것을 통해서 뭘 보여주시려고 할까요? 결국 하나님께 묻지 않는 불신 인생의 말로는 멸망으로 끝난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는 일전에 신문에 보니까, 고 정주영 회장이 산삼을 즐겨 먹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그 산삼을 실제로 파서 정주영 회장에게 판 한 심마니가 인터뷰한 기사였는데, 1980년 당시에 650년 된 산삼을 팠는데, 어떻게 소문을 듣고 왔는지 정주영 회장이 직접 차를 타고, 비서가 돈가방을 들고 따라 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산삼의 가격이 7800만원이랍니다. 당시 강남의 34평 아파트 한채가 2000만원 하고, 대기업 대졸 신입사원 월급이 30만원이던 시절에, 아파트 4채 값을 현금으로 주고, 그 자리에서 650년 된 산삼을 3시간 30분 동안 혼자서 씹어서 먹더라는 내용의 이야기였습니다. 정주영회장이 산삼을 그렇게 해서 먹는게 평생동안 여러 수십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정주영 회장이 산삼이 맛있어서 그랬을까요? 이유는 한가지 일 것입니다. 그거라도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정도로 좋은 것 많이 먹었으면 한 100년 이상은 살았것이라 예상할 텐데, 그는 86년채 살지 못살고 생을 마쳤습니다. 아마 당시 한국 남자 평균연령보다 한 5-6년 정도 더 살았을 뿐입니다. 사실 산삼 한 뿌리 않드신 제 친할머니보다 10년 늦게 태어나시고서도, 10년이나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전6:3).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시91:16).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으며, 사람이 장수하도록 하시는 것도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장수하고 자손을 많이 낳아도 그리스도 밖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없으며, 결국 멸망의 길만 남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되고, 오래살고, 행복한 조건을 많이 갖춘 것 처럼 보여서, 신자로서 비교되고 실망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어도, 결국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주재하시므로 뭘 보여주십니까? 사람이 평생을 왕처럼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리고 살았을지라도,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결국 그 말로는 멸망이요, 그러나 평생을 도망자처럼 처량한 신세로 지낸다 할지라도 여호와를 의뢰하고 믿음으로 살면 그길은 결국 생명의 길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삼하2:1)라고 했을 때, 뭘 물었습니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묻는다는 의미가 뭘까요? 다윗처럼 물으면 그냥 음성으로 들려주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지금은 이제 직접 계시의 시대는 끝났지요. 그래서 이제는 완성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응답을 주시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물을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대답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그 대답을 알아듣나요? 그것은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서 알아 듣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조명하심이 뭡니까? 이것은 마치 무성영화에 변사의 목소리를 입히는 작업과 같습니다. 활자로 된 성경의 말씀이 그냥 있을 때에는 그림만 나오는 무성영화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더해지면서 그것이 입체화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입체화의 작업이 뭘까요? "하나님 제가 어디로 이사 할까요?"라고 다윗처럼 물었다면, 아침에 큐티 묵상을 하는데, 마침 본문이 벧전1:2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마침 "풀"이라는 단어가 3번씩이나 나오는 것을 보고, "아 성령님이 "풀"러턴으로 이사를 가라고 하시나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성령의 조명하심인가요? 아니지요. 성령의 조명하심은,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작업입니다. 진리가 뭡니까? '카논'이지요. 카논은 '잣대, 척도'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성경을 그래서 카논이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우리에게 진리의 잣대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잣대에 의거해서 우리는 응답을 받고,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크리스천 학교 교장님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SB1146 법안을 거부해야 하나요? 아니면 수용하고 학교가 살 길을 모색해야 하나요?"라고 할 때, 그 답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필요가 없이, 성경에 이미 그 잣대를 제시하고 있지요? 롬1장에 보면, 동성애는 하나님앞에서 사형죄에 해당된다고 명시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학교 캠퍼스에 동성애 학생들이 클럽 활동을 하도록 허용하면 안되지요? 그렇다면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조명하심은 교육계의 차별금지법을 허용하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이게 하나님께 물으면 응답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지요. 그리고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주재권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이제 하나님의 주재권으로 묻고, 맡기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사울의 패망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말씀의 주재권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주재권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그의 미래는 자기가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고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