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hip7: 블레셋 땅의 다윗(삼상30:1-20, 2016년6월19일 주일)
오늘 본문은 다윗이 블레셋 땅, 시글락에서 겪은 일을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의 이야기를 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무엘상26-29장까지의 내용은 대강 이러합니다. 26장에서는 사울이 삼 천명의 군사를 데리고 다윗을 잡으러 갑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이 잠든 사이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난 후 27장에 와서, 다윗은 생각하길 “이제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살아나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망명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사울이 다시 나를 찾으려고 이스라엘의 온 땅을 뒤지다가 포기할 것이며,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삼상27:1, 새번역). 그래서 다윗은 600의 군사를 데리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요청을 합니다. 가드는 블레셋 땅의 5대 도시 중 하나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적국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수 있는 성읍 하나를 줄 수 있느냐고 요청합니다. 아기스는 흔쾌히 도시 하나를 주어 다윗과 그 따르는 무리들이 살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도시 이름이 바로 시글락입니다. 차기 이스라엘의 왕이 적국의 성읍에서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어 살아가는 1년 4개월 간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제 다윗은 시글락에서 살면서 600명의 군사와 그 군사들의 가족까지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군사가 600명이었다면, 한 가족이 4인 가족으로만 계산해도, 2,400명이고, 5인 가족이면 3,000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이 많은 식솔들을 먹여 살리려면 다윗은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한 것은 노략질이었습니다. 도적떼 또는 산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일들을 벌입니다. 삼상27장에 보면, 술 광야와 이집트 접경 지역에 사는 그술 사람,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들을 주 공격 대상으로 삼고, 그들을 쳐서 남녀를 멸절시키고 양과 소와 나귀 약대, 의복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삼상27:8-9). 그러면서 한편으로 아기스 왕에게는 거짓말을 하기를, 이 모든 노략물을 유다 남쪽 지역을 털어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이때 노략질을 했던 대상인 아말렉이 결국 오늘 본문 이야기의 화근이 됩니다.
삼상28장에 와서는, 이제 아기스가 블레셋 군대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사울 왕이 거느리는 이스라엘을 치려고 준비합니다. 이때 아기스는 다윗에게도 같이 출정하자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기스는 다윗에게 경호대장 직책을 줍니다. 지금까지만 보면 다윗은 차기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상상하지 못할 결정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서 적진의 그것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경건한 왕 밑으로 들어갑니다. 게다가 이제는 모국인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 자의 경호대장으로 출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기스 왕의 입장에는 사울 왕이 적국의 왕입니다. 그렇다면 다윗도 이제 사울을 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사울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이자 하나님 왕국의 터전인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자의 편에 서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다윗은 지금 너무 졸장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분명히 불신앙입니다. 그냥 내 버려두면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상대로 언약의 후손인 다윗이 전쟁을 치러야 할 판입니다.
사실 다윗이 처음 블레세 땅으로 망명하겠다고 했을 때, 이렇게까지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다윗이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자 도망쳐 왔던 그 결정이 이제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칫 잘 못하면 다윗자신이 미래의 다윗왕국을 허물게 생겼습니다. 이것은 다 다윗 마음대로 불신앙의 땅으로 가기로 맘먹고 나서부터 벌어진 일입니다. 처음에 그냥 피하겠다는 생각에서 가면 안될 땅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냥 간 것이 화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기가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제는 그저 다윗은 상황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죄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타협한 것이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자기의 생각과 의지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죄가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롬6:17)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종을 질질 끌고 갑니다. 그리고 죄의 속박아래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죄로부터 자유하여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었어도, 여전히 죄의 잔재는 신자를 괴롭힙니다. "내 지체속의 한 다른 법이 있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3) 이것이 사도 바울의 고민 거리였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죄와 항상 싸워야 되며, 죄의 잔재의 영향력 아래 늘 끌려 다닐 수 있는 위험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스스로 의지적으로 죄와 타협하고, 죄의 굴레 한번 들어가게 되면, 그때부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상황이 죄가 주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지금 그런 지경입니다. 아기스 아래로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목숨만 부지하려고 갔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자의 편에 서서 경호대장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묘하게 섭리하십니다.
삼상29장에는 다윗이 그 전쟁에 출정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려집니다. 출정을 기다리고 있는 데, 블레셋 군대의 지휘관들이 아기스 왕에게 항의를 합니다. “다윗을 좀 돌려 보내십시오. 저 사람이 싸움터에서 돌변하여 도리어 우리를 칠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다윗은 그 주인인 사울과 화해하기 위해서 우리 군인들의 머리를 베어 바치면서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바로 한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영하면서,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고 했던 자가 아닙니까?”(삼상29:4-5).
아기스는 지휘관들의 요청에 할 수 없이 다윗을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 이야기에는 다윗의 불신앙이 깊이 관여하고 있고, 그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언약을 지키시며,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기 위한 열심을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실수와 실패조차 선으로 돌리십니다. 다윗은 사무엘이 죽자 영적 멘토를 잃어버리고, 더 이상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계속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가 사울을 피해서 블레셋으로 도망치자고 결심할 때 혼자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삼상27:1, 새번역). 다윗의 불신앙은 블레셋으로 도망간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앞서 블레셋으로 도망치려고 한 동기가 더 불신앙입니다. 그가 했던 말을 한 번 보십시다. 다윗은 사울을 두 번째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살려주면서, 사울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임금님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겼던 것과 같이, 주님께서도 나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어떠한 궁지에서도 나를 건져 내어 주실 것입니다”(삼상26:24, 새번역).
다윗이 사울 앞에서 큰 소리로 고백했던 말의 핵심은,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키시고 건져 내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큰 소리 쳐놓고, 다윗이 곧장 어떻게 합니까? “이러다가는 내가 사울 손에 죽을 거다”라고 겁을 내고, 블레셋 땅으로 망명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제일 초라하게 보일 때가 언제입니까? 믿습니다! 하고 확신 있게 소리치고, 기도했는데, 나중에 보면 하나도 믿고 있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때입니다. 나는 예전에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을 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남자는 군대가보면 신앙을 알 수 있고, 여자는 시집가는 거 보면 신앙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형제들은 큰 소리 칩니다. 군대에서도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랬는데 쫄병 시절 고참들의 눈치보느라 교회를 가지를 못합니다. 자매들은 기도할 때마다 “믿음의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나의 이상형은 다른 것 필요 없고, 신앙이 가장 먼저입니다!”라고 그렇게 큰 소리 쳤던 자매들이 나중에 보면 불신자에게 시집가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형제를 전도하라고 붙여주신 것 같다고…” 물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제 어머니도 그렇게 해서 결국 제 아버지를 전도했고, 지금은 아버지의 믿음이 전혀 어머니 믿음보다 뒤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후회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되거든요.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 안에서 뒤짚어지는 사건은 인력으로 되질 않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지요. 그러니 성경 말씀대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잘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렇게 큰 소리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실 거라고 해 놓고선, 당장 돌아서서 사울의 손에 죽게 되었으니, 적국의 땅에라도 도망치자라고 합니다. 정말 신앙은 말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 믿음은 말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입니다. 다윗과 600명의 군사가 시글락에 돌아옵니다. 돌아와 보니 시글락 성이 공격을 받아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아말렉이었습니다. 아말렉이 그랬던 것은 일종의 복수극입니다. 앞서 살펴 본대로, 다윗은 시글락에서 600군사와 그 식구들까지 수 천명의 식솔들을 책임지기 위해서, 약탈을 일삼았는데 그 대상 중에 하나가 바로 아말렉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기스 편에 서서 출정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공격을 하고는 여자와 아이들은 포로로 잡아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모국인 이스라엘과 전쟁하지 않아도 되는 은혜를 입고 돌아왔는데, 성이 불타고 아내와 자녀들이 잡혀간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은혜를 주시려면 그냥 순조롭게 주시지, 이렇게 은혜를 입고 다시 시글락으로 복귀했는데, 이런 슬픔을 겪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윗이 진심으로 깊이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제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뭔가 특별처방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다윗의 마음 깊은 곳이 움직여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글락을 비운 사이 아말렉이 공격한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사실로 성경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타이밍입니다. 1절에 보면 “사흘 만에 시글락으로 돌아왔을 때에”(새번역)라고 성경이 기록합니다. 다윗이 사흘 만에 복귀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시간 중에 해필 그때란 말입니까? 그때가 요즘같이 첩보, 정보가 뛰어나던 시절도 아니고, 인공위성과 드론을 띄워서 적의 동태를 실시간 살피던 시대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필 3일을 비운 사이에 그곳을 공격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둘째, 아이들과 노인, 부녀자들을 하나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갔다는 사실입니다(2절). 성경은 하나도 죽이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아말렉을 쳐서 노략할 때와는 정반대의 기록입니다. 삼상27:9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무슨 말입니까? 아말렉이 얼마 전 다윗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시글락을 공격할 때 그 자리에서 다 죽였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말렉은 “하나도 죽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일도 하나님이 관여하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모든 우연히 보이는 사건 조차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고 계십니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신자가 죄를 짓는 것 또한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허용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신자의 잘못을 선을 돌리시기 위한 과정을 두십니다. 둘째, 잘못한 신자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이제 하나님을 찾고 회개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죄인을 깨닫게 하시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은 회초리를 드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회초리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조만간 우리가 사무엘하를 살펴보겠지만, 삼하7장에 가면,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겠다”(삼하7:14). 하나님이 죄인을 돌아오게 하시는 방법은 당근이 아니라, 인생의 채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죄인이 그제서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내와 자녀들을 잃은 다윗과 600의 군사들은 얼마나 울었던지 “모두들 더 이상 울 힘이 없어 지칠 때까지 울었다”(삼상30:4, 새번역)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다윗의 두 아내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잡혀갔다고 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한 절을 할애해서 다윗의 두 아내도 같이 잡혀 갔다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여러분이 만약 성경의 영감이 오류가 없고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필요한 의도를 보여주시기 위해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구절이 왜 들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성경은 이미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을 동시에 한 구절에서 같이 두 번 더 언급한적이 있습니다. 삼상25장과 27장에서 입니다. 삼상25장에서 나발과의 사건이 마무리 되면서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또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니라”(삼상25:43). 여기서 성경은 “또”( also)라는 단어와 “두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니라”라는 단어를 씁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다윗이 또 아내를 맞이 했다는 사실과 부인이 두 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상27장에 넘어가면, 아기스 왕에게 망명요청이 받아들여 진 후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삼상27:3). 여기서도 “두 아내”라는 단어를 쓰면서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의 이름을 동시에 언급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왜 이토록 두 번씩이나 아히노암과 아비가일의 이름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두 사람”과 다윗이 결혼했고, 같이 망명생활도 했다고 기록할까요? 그것은 다윗이 지금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 어디에도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다는 조항이 없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율법에 혼인과 이혼 조항은 한 명의 아내와 한 명의 남편을 토대로 기록했습니다. 율법이 생기기 전, 창조의 원리를 보더라도 이것을 분명히 합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여기에는 결혼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창조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첫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 동성결혼은 성경이 허락지 않습니다. 둘째,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야 합니다.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성경은 허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믿음의 인물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하는데, 잘 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하나님은 지금 다윗의 불신앙과 연속적으로 잘 못된 행동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다윗의 불신앙의 문제들은 굉장히 복잡할 정도로 여러 가지가 겹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글락이 공격받게 하시고, 아히노암과 아비가일 두 사람도 잡혀 갔다는 이야기를 한 구절을 할애해서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 본인의 마음은 어떨까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첫째, 두 아내를 잃게 된 슬픔 마음입니다. 둘째, 부하들의 가족이 다 잡혀 간 슬픔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셋째, 도망자 생활의 그나마 작은 왕국이었던 시글락이 불탔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심경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는데, 다윗을 당황케 하는 사건이 더 하나 터지려고 합니다. 따르는 자들의 원망입니다. 그 원망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다윗을 돌로 치자 ”(삼상30:6) 할 정도였습니다. 가족들을 한꺼번에 잃은 다윗의 군대는 지금 망연자실을 넘어, 분노의 대상을 찾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다윗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정신을 번쩍 차립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을 의지해야겠다는 마음이 그제서야 생깁니다. “다윗은 자기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6절, 새번역). 사람은 환란을 만날 때에야 비로소 주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이게 인생 채찍의 목적이지요. 신자에게 왜 힘든 일이 계속 생길까요?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섭리로 보면, 인생 채찍으로 하나님을 더욱 찾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은 죄인인지라 자기를 의지하고,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실패를 바로 잡으려고 하실 때 그냥 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환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그 마음을 돌이켜 주님을 찾게 하십니다. 이것이 인생 채찍입니다.
이제 다윗은 한 동안 하나님께 묻지 않다가 이제서야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제가 이 강도들을 추격하면 따라 잡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언제 이런 것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사울을 피해 블레셋 땅으로 도망칠 때에조차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던 다윗이 지금은 이제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태도가 점점 하나님 중심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의도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윗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틀림없이 되찾을 것이니, 추격하여라!”
이제 다윗은 군사들을 이끌고 추격합니다. 추격 중에 한 이집트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 이집트 사람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탈진 상태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충분히 먹여서 극진히 돌봅니다. 그리고 제정신을 차립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이 묻습니다. “너의 주인은 누구이며, 네가 사는 곳은 어디냐?” 그러니 그는 이집트 출신의 소년이며, 아말렉 사람의 노예로 있었는데, 병이 들자 주인이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시글락도 공격해서 불도 질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습격자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느냐고 했고 결국 그 소년이 아말렉의 본거지로 안내해 줍니다. 아말렉은 승리에 도취해서 사방에 흩어져서 먹고 마시며 큰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술 취해서 싸우기가 힘들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기습공격을 해서, 모든 가족들과 약탈 당한 것과 또한 아말렉이 다른 곳에 약탈 한 것까지 다 되찾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 나올 법한 “우연”이 등장합니다. 이집트 소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집트 사람을 만나기까지의 우연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1. 다윗의 군인들이 들녘에서 이집트 소년을 발견합니다(11절).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2. 주인이 사흘 전에 버렸습니다. 이유는 병이 들었던 것입니다(13절). 이 또한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3. 영문을 모른 채 죽어가는 소년을 극진히 돌봤습니다(12절). 지금 원수들을 한 시라도 빨리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도무지 그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돌봄과 사랑이 행해집니다. 4. 그런데 그 소년이 깨어납니다(12절). 주인이 버리고 갈 정도로 병이 들었다면 왠만한 의사 아니면 고치기 힘든 병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노예도 중요 재산목록이기에 버리려고 했다면 분명히 중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낫습니다. 5. 해필 그 소년이 이제 사흘전에 시글락을 불태웠던 자들과 한 패였습니다(14절). 6. 그런데 이 소년이 혈통이 아말렉이 아니라 이집트인이었다는 것입니다(11절). 이게 왜 중요합니까? 군인들이 들녘에서 발견했을 때 이 사람이 아말렉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였거나, 혹 살려서 심문을 했을 지라도 절대 자기 동족을 배반하지 않았을 가능이 큽니다. 더욱이 노예로 버려짐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의 섭리의 역사입니다. 비록 다윗이 범죄하고, 불신앙 하여, 실수하여 여러 가지 환란이 닥치고 일이 꼬였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다 선으로 돌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