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hip 6: 다윗과 나발과 아비가일(삼상25:1-42, 2016년6월12일 주일)
오늘 본문 1절은 “사무엘이 죽었다”라고 시작합니다. 사무엘이 선지자로서의 임무가 끝이 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데리고 가십니다. 사무엘상 25장의 내용과 전혀 관계없이 한 구절을 사무엘의 죽음에 대해서 할애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다윗과 사울에게 어떤 식으로든 큰 영향을 준다라는 의미입니다. 특히 사무엘상 25장에서 나타나는 다윗의 행동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사무엘의 죽음이 갖는 두 가지 심리적 영향이 있다고 봐 집니다. 첫째, 다윗은 영적 멘토가 죽음으로 이제 스스로 험한 길을 헤쳐가야 하는 영적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다윗의 영적 슬럼프에 적게나마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사울에게 잔소리꾼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말은 이제 사울이 다윗을 더 죽이려고 날뛰게 하는 동기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무엘상 25장은 다윗이 얼마나 영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지며 슬럼프를 가지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본문의 “전후 문맥”을 살피면 저자의 더 깊은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성경 내러티브(narrative) 본문(이야기 본문)은 문맥의 구조나 배치를 통해서 “대비, 비교”하는 내용을 기록함으로써 주제를 부각시키고 강조하는 문학적 기법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본문입니다. 앞장 24장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뒷장 26장에도 또 한번 더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않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5장은 다윗이 사람을 직접 죽이려고 시도하는 장면입니다. 24, 25, 26장 석 장이 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려두거나 헤치려 하는 것에 대해 기록하는데, “절제-무절제-절제”라는 도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스토리 라인을 한번 살펴 봅시다.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다윗, 나발, 아비가일. 먼저 나발 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온이라는 지역에서 굉장한 부자였습니다. 성경은 그의 재산 규모를 양 3,000마리, 염소 1,000마리라고 소개합니다 (2절). 나발의 성격은 고집이 세고 행실이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3절). 게다가 그는 지혜가 전혀 없는 어리석은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부인이 그를 소개하기를 “나발”이라는 이름은 ‘어리석은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25절). 어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멍청이’라는 이름을 짓겠습니까? 아마도 나발이라는 이름은 실명이 아닐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성경이 나발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으로 봐서는 나발은 가진 재산에 걸맞지 않게 센스 없고 고집 센 졸부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그와는 완전히 반대의 인물로 묘사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아비가일입니다. 아비가일은 이해심도 많고 용모가 아름답다고 성경이 알려줍니다(3절).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부부커플이 나발과 아비가일이라고 봐집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부자 나발이 양털을 깎고 있습니다(2절). 성경에서 양털을 깎고 있다고 하는 기록은 창38장 유다와 다말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성경에서 이 양털을 깎고 있다는 기록을 하는 이유는, 그 시기가 어떤 시기인지를 보여주는 단서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양털을 깎는 시기는 축제의 시기입니다. 그때는 온 마을이 양모를 모아서 큰 거래가 성사되고 수입이 발생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잔치가 벌어집니다. 술과 음식이 풍성하고 사람들마다 들떠있는 시기입니다. 오늘날 미국으로 따지면 Thanks Giving Day나 연말 세일하는 시즌같이 사람들마다 선물을 주고 받고, 서로 초청하여 음식을 즐기고, 누군가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인심을 베푸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농장주인은 종들에게 상을 주고, 업주는 일군들에게 품삯보다 더 후하게 보너스를 챙겨주기도 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다윗이 광야에서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하 10명을 나발에게 심부름을 보냅니다. 다윗은 그 부하들에게 전할 말을 이렇게 전하라고 하면서 그 내용까지 상세히 알려줍니다(6-8절). 이 대목은 다윗이 얼마나 정중하게 메세지를 전달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 메세지의 내용은 우리가 당신의 목자들이 하는 일을 잘 돌보아 주었는데 털 깎는 시기에 잔치를 벌이는 좋은 날이니 먹거리를 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저번 시간에 살펴보았던 본문에서는 다윗이 이제 막 도망자 생활을 시작하던 시기에 놉 땅 성소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음식을 달라고 할 때, 떡 다섯 덩이를 요구했을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그 따르는 무리가 극소수였을 것으로 짐작했습니다.(삼상21장). 그리고 그가 아둘람 동굴에 있을 때에는 400명의 무리가 따릅니다(삼상22장). 그런데 이제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이 제법 늘었습니다. 13절에 보면 600명 정도라고 밝힙니다. 이 사실은 다윗이 지금 얼마나 음식문제로 신경을 써야 하며, 마음의 압박을 받고 있는지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600명의 사람이 칼을 차고 군사 노릇을 하려면 하루에 얼마나 음식을 먹어야 될까요? 일전에 신문을 보니 한국 군인의 하루 급식 열량을 3100kcal로 국방부가 정했다고 했습니다. 최소한 전쟁에서 싸우려면 그 정도는 먹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3,000년 전의 군인들은 그 것보다 아무리 적게 먹었다고 하더라도, 2,000kcal는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특히 다윗의 군대는 지금 쫓기는 신세이며, 광야에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으며, 특히 잦은 도적떼들과 이방족속들과의 전투를 치르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열량이 소모되었을 것입니다. 음식 없이는 다윗의 600명은 존립할 수 없었습니다.
구글에 음식 열량표를 한번 찾아 보았습니다. 쌀밥 한 공기가 300kcal, 우유 1팩 125kcal, 치즈 한토막 113kcal, 빵 79kcal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다윗의 사람들이 하루의 얼마만큼의 식량을 확보해야 이정도의 열량을 보충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윗은 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어야 할까요? 굉장한 정신적 압박을 줄수 밖에 없는 일일 것입니다.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장정 10명을 보내서 음식을 좀 달라고 하는 것은, 군사들의 간식거리가 필요하다거나 양털 깎는 시기에 잔치 음식 맛이라도 좀 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총 사령관으로서 하루 일과 중 가장 신경 쓰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그날 음식을 마련하지 못하면 군대는 와해되고, 다윗의 도망자 생활도 위험에 빠지고, 또 훗날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등극하기 위해서 때를 기다리는 것 또한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하루에 여러 번 음식 조달 문제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고, 상당한 심적 압박으로 다가 왔을 것입니다. 사울에게 쫓긴다는 스트레스보다 어쩌면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먹여 살려야 된다는 부담감이 훨씬 높았을 것으로 봐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바라 봐야 합니다.
나발은 먹거리를 요구하는 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냥 거절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욕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다윗이란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10절). 나발은 다윗이 지금 도망자 생활하는 것을 “주인에게서 뛰쳐나간 종”에 비유합니다. 말하자면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친 못되먹은 신하라고 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다윗의 부하들은 돌아가서 그대로 전합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다윗의 반응이 뭡니까? “모두 허리에 칼을 차거라!”(13절). 400명은 다윗을 따르고, 나머지 200명은 물건을 지키며 대기하라고 명령합니다. 다윗이 400명에게 무장시키고 가겠다고 하는 것은 나발 한사람만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지요? 일가족 또는 그 주변을 다 몰살시키겠다는 뜻이지요. 22절에서도 다윗이 속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침까지 그 집안의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않겠다"
여러분 이 본문을 대하면서 여러분은 다윗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음식을 좀 못주겠다고 했기로서니 저렇게 까지 할 수 있을까? 또는 자신을 도망치는 종으로 비유하여 기분을 상하게 했기로서니 저렇게까지 가족을 몰살시키기 위해서 가는 것이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그것도 다윗이 말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다윗의 행동의 이유를 정확하게 분석해야만 합니다. 왜 다윗이 지금 이렇게까지 행동할까요? 큰 두 가지 표면적 이유가 있다고 봐집니다.
첫째, 상황적 이유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다윗은 지금 자신의 군대를 먹이고 살려야 하는 책임감과 압박감에 하루하루를 지내는 상황입니다. 심적 고충이 크면 클수록 행동은 거칠고 분노 조절을 하기가 힘이 들지요. 뭔가 계획한 대로 해야 하는데, 잘 진행이 안되면, 분노가 폭발합니다. 다윗이라고 그것에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둘째, 정서적 이유입니다. 먼저 다윗은 자신이 모욕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본래 모습을 떠 올려보십시다. 그가 골리앗을 상대 할 때 했던 말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너가 모욕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니..." 다윗이 분노했던게 뭡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 자신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이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않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쩌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모욕받는 것이 사람을 죽여야 직성이 풀릴정도로 화가 나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윗은 지금 영적으로 바닥일 뿐 아니라, 도망자 생활을 통해서, 특히 600명의 음식을 조달해야 하는 문제로, 심리적 정서적으로도 밑바닥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궁지에 몰리니 다윗도 별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본래 선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제 힘든 순간을 만날 때, 그도 하는 수 없이 죄인일 수 밖에 없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다윗의 본성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지금 자신이 받아야 할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는 나에게 선을 악으로 갚았다”(21절). 다윗은 왜 자신이 뭔가 대접받아야 할 위치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21절에서 밝힙니다. “내가 저 광야에서 그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켜주어, 그의 모든 재산 가운데서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였으나, 그것이 모두 헛일이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이 나발의 재산을 지켜주는 일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자기만의 착각일까요? 그런데 나발의 종 중에 한 명이 그 여주인 아비가일에게 있었던 일을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우리에게 정말 잘해 주었습니다…..사실 밤낮으로 그들은 우리에게 담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양은 물론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었습니다” 나발의 종들이 인정할 만큼 다윗의 군대는 나발의 재산을 지켜주는데 밤낮을 마다하지 않고 애를 많이 썼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밤낮으로 출몰하는 도적떼를 소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 이방 족속들이 쳐들어와서 재산이 위태위태 할 때에도, 지켜주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처음부터 나발과 계약을 맺고 그 일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주석가들은 그냥 호의를 베풀어 주는 식으로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약이든 그렇지 않든 다윗이 나발의 지역에서 배회하면서 나발의 재산을 지켜주는 일을 했던 것은, 그 지역이 바로 유다 지파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발은 유다 지파 지역에 속한 마온이라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나발을 “갈렙 족속”이라고 밝힙니다(3절). 우리는 여호수아의 군대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땅 분배를 할 때,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하면서 헤브론 땅을 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헤브론이 유다 지파 땅 안에 있는 산악지역입니다. 그리고 나발이 사는 마온은 이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가까이 있는 지역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과 나발은 같은 지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우애를 불태웠던 조상들의 후손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대로 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는, 형제 가문입니다.
다윗이 지금 분노하고 있는 그 정서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좀 느껴지십니까? “나는 지금 같은 지파 사람이라고 이렇게까지 애를 쓰고 있는데, 나를 이렇게 홀대하느냐?” 그 말입니다. 게다가 나를 “주인을 버리고 도망간 나쁜 종”으로 비유하면서까지 모욕을 하는 그것에 분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이 정말 잘 못하고 있는 이면의 죄는 뭘까요? 나의 개인적인 묵상으로는 다윗이 보복하려는 표면적인 의도는 그 일가족을 죽여서라도 분풀이를 하고 싶은 것이지만, 실상 궁극적인 의도는 그렇게 해서라도 음식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숨어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일 가족을 몰살시키면, 나발의 그 모든 재산은 자연스럽게 다윗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 재산으로 적어도 몇달은 다윗의 군대가 버틸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실속 있는 것입니까?
다윗이 분노하는 이 두 가지 큰 이유, 상황적, 정서적 이유가 제법 그럴 듯 해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의 불신앙이 뭡니까? 자기 자신이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불신앙입니다. 생사여탈권을 마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듯이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사화복, 생사여탈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재권(Lordship)입니다. 왕권(Kingship)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참신자가 아닙니다. 참신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주재권 아래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먹고 마시고 입는, 살아가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서 책임 지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관련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1-33). 우리의 생사여탈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도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는데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되면 내 탓이고, 안 되면 주님 탓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하고 가난하고 건강하고 아프고 높아지고 낮아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재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자는 이 이야기를 삼상24장과 26장 사이에 살짝 끼워 놓았습니다. 왜일까요? 이 이야기를 앞 뒤로 감싸고 있는 두 본문에는 다윗이 사울을 두 번씩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그때 다윗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12절). 다윗의 믿음의 고백은 “하나님께서 직접 판단하시고, 잘 못이 있는 자를 보복하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자신이 직접 보복하려 합니다. 그래서 400명인에게 칼을 차고 나를 따르라! 그럽니다. 뭐가 잘 못 됐습니까?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자기 의지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일 아침까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남자들을 하나라도 남겨 둔다면, 나 다윗은 하나님께 무슨 벌이라도 받겠다”(22절). 지금 나발 집안의 모든 남자들을 죽이려고 갑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누구의 이름을 들먹입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주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지금 제3계명을 어기고 있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다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이성적 판단력도 떨어졌을 뿐더러, 영적 판단력도 흐려졌습니다. 사울을 대할 때만 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던 그의 믿음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신의 마음을 시원케 하기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다윗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별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한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고 놓아주는 믿음이 있었다 할 지라도, 그 믿음이 변질되고 떨어질 수 있는 한없이 약한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한때 아무리 큰 일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받을 일을 하고서도 한 순간에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죄악의 길을 걸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우리는 조금만 방심하면 넘어집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교만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죄를 짓는 줄도 모르고 죄를 짓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서 기도하고 성령충만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길로 빠지기 직전에 있는 다윗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아비가일을 사용하십니다. 아비가일은 종으로부터 되어진 사실을 전해 듣고 서둘러서, “빵 이백 덩이와 포두주 두 가죽부대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곡식 다섯 세아, 건포도 뭉치 백개,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나귀 여러 마리에 싣고 다윗의 군대가 오는 길목으로 나갑니다 (18절). 그리고는 다윗과 마주칩니다. 아비가일은 당장 다윗에게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합니다. 그리고 간청합니다. 이 아바가일이 다윗을 설득시키려는 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죄는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24절). 그 자리에 자기가 없었기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편은 어리석기만 해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기만 했었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간청합니다. 아비가일은 자기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참 신자의 가장 중요한 표지는 자기를 날마다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여 주실 것이요"(요일1:9). 참 신자는 모든 안되어지는 일이나 막히는 일이 생길 때,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자신이 힘들고 실패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길을 걷고 있을 때, 그것은 남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의 죄악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배우자 잘못도 아니고, 교회 리더의 잘못도 아닙니다. 자신의 죄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참 신자는 매일 매일 자신을 주님앞에 은혜를 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며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둘째, 원수는 하나님께서 친히 갚으실 것입니다(29절). 사실 다윗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이미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던 때에 그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24:12). 이미 자기 입으로 고백했던 사실을 지금 아비가일을 통해서 다시 반복해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자신이 했던 신앙고백 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아비가일의 입술을 통해서 다시 다윗을 일깨워 주십니다.
셋째,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후회할 일을 하시면 안됩니다(31절).
아비가일의 말이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서 다윗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하지요. “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오늘 그대를 보내어 이렇게 만나게 하여 주셨으니, 주님께 찬양을 드리오”(32절). 다윗은 이 여인을 도중에 만난 것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것으로 믿고 찬양드립니다. 다윗이 정말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나마 정말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굉장히 빠르고 정확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 못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싸인이 있으면 금방 그것을 알아차리고 돌아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장점입니다.
신자는 그래야 합니다. 잘 못을 하다가도 하나님의 경고가 들려지면, 거기서 멈추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야 참신자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을 하다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대도 그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 불순종하고, 죄악 가운데서 버티다간 큰일 납니다. 신자는 항상 깨어서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민감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신자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묵상할 때, 그리고 기도하는 중 말씀의 구절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평소에 들었던 설교말씀과 성경공부로 배웠던 말씀들이 떠올라 하나님께서 찔림을 주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선한 양심이 작용하여, 나의 죄악을 보게도 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신자는 죄악에서 돌이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