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hip5: 놉으로 간 다윗(삼상21:1-9, 22:6-23, 2016년6월5일 주일)
오늘 본문은다윗의 본격적인 도망자 생활이 시작되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왜 다윗이 도망자 생활을 하게 됩니까? 사울 왕이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죽이려고 할까요? 표면적 이유와 이면적 이유 두 가지를 성경은 말합니다. 첫째, 표면적 이유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아들 요나단과 대화하면서 드러납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삼상20:31). 나라를 자식에게 물려 줄려고 하는데 다윗이 그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는 아비의 심정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이면적 이유는 좀 더 감정적인 것입니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한 이스라엘군대가 사울 왕이 앞장 서서 개선 행진을 합니다. 이때 환영 인파들이 모여서 외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이 말을 들은 사울의 감정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삼상18:8). 사울은 사람들이 다윗에게 공을 돌리고 칭송하는데에 대해서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질투심이죠. 그러고는 성경이 이렇게 이어서 기록합니다.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18:9).사울은 이 날 사건 이후로 계속 다윗을 불쾌하고 화가 난 상태로 보고 대했다라는 말입니다. 그의 이면적인 감정의 상태가 표면적 정치적 입장으로 나타나서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가 분명한 것을 확인하고, 도망칩니다. 다윗이 도망친 곳은 놉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성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제단뿔이 있습니다. 율법에 죄를 지었을 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제단뿔을 잡으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울이 그런 하나님의 율법을 잘 이행할 위인이 못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이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납니다. 아히멜렉이 어떻게 혼자 왔느냐? 고 묻습니다.(1절). 왕의 사위이고, 나라의 고위직이면 당연히 수행원이 있어야 할 것인데, 왜 혼자 왔느냐는 질문입니다.그런데 다윗은 왕의 비밀작전을 수행 중이라고 둘러댑니다(2절). 거짓말이죠. 사실 왕명으로 수배령이 내린 인물이 도망 중에 있다면, 누구든지 목숨을 위해서 거짓말하는 것 쯤이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거짓말로 인해 아히멜렉의 가문이 거의 몰살하게 되는 사건이 나중에 벌어집니다. 이것은 나중에 다루기로하겠습니다.
이제 다윗은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합니다. 아히멜렉은 일반 빵은 없고, 거룩한 빵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만약 다윗 당신과 따르는 자들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면 주겠다고 합니다. 율법 명령에 진 안에서 성적으로 정결하도록 정결법을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전쟁을 수행 중에 있을 때에, 모든 군인들에게 성적인 절제를 요구하는 규정으로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히멜렉은 그런 규정을 다윗과 그 따르는 자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3일 동안 그 규정을 잘 지켜서 정결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아히멜렉 제사장은 빵을 건네 줍니다.
여기에서 과연 제사장만이 먹는 진설병을 일반인들이 먹어도 되느냐?는 의문을 표합니다. 그리고 그 의견도 분분합니다. 다윗이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냐?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내버려 두느냐?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에 대해서 해석을 하십니다. 마12장에 보면 안식일 논쟁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날에 밀밭 사이로 가시다가 제자들이 배가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날 하면 안되는 일을 하는데어찌된 일요?”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마12:3-4).라고 말씀하시면서, 다윗과 아히멜렉의 행동이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십니다.
아히멜렉이 빵을 주면서 이빵은 이제 “물려낸 것”(6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빵이 어떤 빵인지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이 빵은 분명히 진설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설병은 성소안의 떡상에 항상 진열해 놓는 것인데,레24장에 보면 성소의 떡상에 매 안식일마다 새로운 떡을 진열하도록 명령합니다.그래서 “물려낸 것”이라는 말로 보아 빵이 일주일 되었다는것입니다. 방법은 두 줄로 각각 6개씩 쌓아서 총12개의 떡을 쌓아 놓아야 하는데, 그것은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고 기록합니다.그리고 그 떡은 고운 가루로 만들로 한 덩이를 에바 십분이 이로 만들어야 된다고 레시피를 지정합니다. 1에바가 22리터이므로, 22리터의2/10즉, 20%는 약 4.4리터가 됩니다.1갤런이 3.78리터이니, 대략1.2갤런 정도의 밀가루로 만든 빵이라고 생각하시면 상상이 되실 겁니다. 그 크기는 출25장에서 떡상의 크기를 길이가 2규빗, 넓이가1규빗이라고 나옵니다. 말하자면 길이 90센티미터,넓이 45센티미터이므로, 아마도 여기에 떡을두줄로 쌓았다면, 떡의 크기는 지름이 대략 40센티미터 전후였을 것이라고짐작됩니다. 두께도 그렇게 두껍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명히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6절에서 “물려 낸 빵”이라고 설명하듯이 이 빵은 성소의 떡상에 진열한지일주일이 지난 빵이었습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중동의뜨겁고 건조한 날씨에, 그것도 누룩 없이 부풀지도 않은 일주일 된 빵을 먹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그것은 정말 맛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다윗은 그 빵을 5개를 달라고 청합니다. 과연이 정도의 양의 빵으로 도대체 몇 명이 먹을 수 있을까요? 다윗은 아직 많은 군사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오늘 본문 다음 장 삼상22장에 보면, 다윗이이후에 아둘람 동굴로 도망갔을 때, 따르는 자들이 400명가량 모여들었다고밝힙니다. 그러나 지금 놉땅에 있을 당시에는 그것보다 훨씬 적은 인원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윗이 진설병이 12개가 있음에도 그것을 다 달라고 하지 않고, 해필이면 다섯 덩이를 달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다윗을 보필하면서 따르는 무리가 극소수였을것으로 추정합니다. 왕의 사위이면서, 나라의 고급관리가 하루 아침에초라한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윗은 지금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반드시 신경써야 했습니다. 첫째는 음식이었고, 둘째는 무기였습니다. 세상역사의 모든 도망자들이 구하려고 하는 두 가지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음식과 자신을 보호해 줄 무기가 있다면, 그나마 안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래서 다윗도 제사장에게 음식을 받고 나서 한가지 더 요구합니다. “제사장님 혹시 창이나 칼이 있습니까?”(8절).거기에다가 거짓말을 덧붙입니다. “왕의 비밀임무를 급하게 수행하다보니 미처 무기를 가져 오지 못했습니다”라고 합니다.이때 제사장은 골리앗의 칼을 꺼냅니다. 다윗이 물멧돌로 죽이고 전리품으로 남은 그골리앗 칼입니다. 이 칼이 어떻게 해서 놉의 성소에 와 있는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침 박물관의 고대 전사의 칼 처럼, 거기에 보관되어져 있다가 가장 잘 어울리는 주인다윗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도 “그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9절)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칼을 건네 받습니다.
한번 다윗의지난 일을 회상해 봅시다. 다윗이 칼 하나 없이 3미터 가까이 되는골리앗을 죽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다윗이 했던 멋진 말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여호와의 구원하심이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삼상17:45,47). 여기서 다윗의 신앙고백의 핵심이 뭡니까? “하나님은 칼과 창으로 싸우시지 않는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칼과 창에 의지하지 않으신다 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앞에서 멋져 보이는 이유가 뭡니까? 그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십시오. 그랬던 다윗이 지금 뭣 때문에 불안해 하고 있습니까? 칼이 없으면 죽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싸여 있습니다. 사실 다윗은 이 칼을 자기 목숨을 지키기위해서는 단 한번도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칼로 결국 그일라 족속을 구하는데 사용하게 됩니다.
다윗은 한때그렇게 용맹하고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해서 물멧돌만 가지고 적장을 상대했지만, 이제 그런용기와 믿음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자신을 보호할 무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큰 소리 치던 그 믿음은 사라지고, 연약하고 초라한상태로 전락한 상태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령 충만할 때와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이 얼마나 대조적인 지를우리는 자주 봅니다. 다윗은 이제 도망자의 신세로 인해 그의 인생이 얼마나 한낱 죄인이며 보잘 것 없는 사람에불과한지를 깨닫게 되고, 더욱 하나님을 의뢰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배워가게 됩니다.
이제 본문에삽입된 구절을 봅시다. 7절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살기 위해서 음식과무기를 구하는 동안, 이것을 가까이 자연스럽게 지켜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에돔 사람 도엑이라고 소개합니다(7절). 도엑은 사울의 신복이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직책은 오늘날로 따지면 비밀경찰대장 정도 되었을지모르겠습니다. 도엑이 무슨 일로 놉땅 성소가 있는 곳에 머무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거기서 다윗을지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22장 본문에 보면 이제 도엑이 사울에게 다윗에관한 정보들을 주게 됩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에게 음식도 주고 골리앗의 칼도 주었다고 얘기합니다.그래서 당장 아히멜렉과 놉 땅에 있는 제사장들을 모두 함께 왕명으로 소집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왜 다윗에게 음식과 칼을 주어서 나를 대적하는 일에 공모했느냐고 몰아붙입니다. 이때 아히멜렉은 다윗은 왕의 사위이고, 인정받는 신하도 되는데 어찌 그런 일을 하겠느냐?고 대답합니다. 분명히 아히멜렉은 다윗이 쫓기고 있는 신세였는지도 몰랐을 뿐더러,다윗이 한 모든 거짓말에 그대로 믿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아히멜렉은 억울한 지경에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히멜렉과 온 집안의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때 수하의 군인들이 제사장을 죽이라고 하니까 죽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도엑에게 명령을 합니다. 이때 도엑은 그 자리에서 85명의 제사장을죽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 명이 도망치는 데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만 도망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가서 전후 사정을 다 얘기합니다. 이때 다윗이 그럽니다.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삼상22:22).다윗 자신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어떻게 봐야 합니까? 다윗의 거짓말 때문에 무고한 85명의 제사장이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맞습니까?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그것이 맞습니다. 당연히 자신의 양심에 찔려서 아파하고 사죄해야 하는 사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이일로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다윗은 이 후에 자신의충복 우리야를 전쟁의 최 선봉에 내보내서 죽게 합니다. 이때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을 호되게 야단칩니다.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1명이 아니라, 자신의거짓말로 인해서 85명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다윗이잘못 했다고 하나님이 꾸짖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심판의 예언이 다윗을 통해서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삼상2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 집안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그 집안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 심판의 내용은 “내가 네 자손과 네 족속의 대를 끊어서,너의 집안에 오래 살아 나이를 많이 먹는 노인이 없게 할 날이 올 것이다”(새번역,삼상2:31). 하나님은 예고하신 대로 엘리의 증손자인 아히멜렉과 그 집안을 심판하십니다.그런데 다윗의 실수를 통해서 그 예고를 성취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읽다 보면 다윗이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이유를 찾기가 힘듭니다. 어떨 때에는 굉장히 믿음이 있는것 같다가, 어떤 때에는 굉장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처세술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이 보입니다.다윗이 얼마나 처세술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 계산하는 사람인지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삼상22:22, “그날 내가 에돔 사람 도엑을 거기에서 보고서, 그가 틀림없이 사울에게 고자질하겠다는 것을 그 때에이미 짐작하였소…”다윗은 이미 놉땅 성소에서 도엑을 보았고, 도엑이 왕에게 고자질 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한참 성질이 돋구어져 있는 사울이 어떻게행동할 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도엑이 보고 있을 동안 아히멜렉과 음식과 무기를 거래하게 되면,앞으로 어떤 피바람이 불지 뻔히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거래를중단하지도 않았고, 보이지 않게 살작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안위를 위해서 자신은 음식과 무기를 받고 성소를 떠났지만, 예상한대로 자신으로 인해 무고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오늘날 법적 용어로 정확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다윗은 자신이 의도하지는않았지만, 뻔히 내다보이는 상황으로 치달을 줄 알면서 한 거짓말을 통해서 85명이 죽게 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심판하시겠다고는 했지만,다윗의 관점으로 보면 그것은 분명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관되게 그런 다윗을 사랑하시고,다윗을 이스라엘 제2대 왕으로 등극하기 까지 신실하게 인도해 가십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성경 인물 중에하나님을 가장 신뢰하면서도 가장 하나님의 계명을 많이 어긴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다윗입니다. 다윗은 살인하지말라는 6계명을 어깁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어깁니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여, 도적질하지 말라는 8계명을 어깁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이나….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탐내지 말찌니라 하신 10계명을 어깁니다. 다윗은 십계명 중 노골적으로4개의 계명을 어기는 사람입니다. 아니 신앙을 떠나서, 일반 사회법으로 따지면 1급살인자이며 파렴치한 강간범이며, 가정파괴범입니다. 이 정도면 오늘날 LA에 살았다면,최소 형량이 징역100년 이상은 선고 받든지 아니면 사형 언도를 받았을 것입니다.그런데 어떻게 이런 다윗을 하나님은 그냥 살려둘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은 이것을두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가르칩니다.
히11장 32절과 33절에 보면, 다윗과 여러 믿음의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이런 인물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정도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언급하면서,결국 그는 “저희가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라고 기록합니다.우리는 정말 의아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다윗같이 형편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도“믿음”이 있다고 성경이 말할 수 있을까?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신자의믿음을 이야기 할 때, 신자 자신의 “의”를말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의를 말씀합니다. 신약적으로 말씀드리면, 신자의 의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이미 우리도 그와 함께 못에 박히게 된 것입니다(갈2:20).그리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믿음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9).
시52편은 다윗의 믿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52편의 제목을 이렇게 달아 놓았습니다. [에돔인 도엑이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더라 말하던 때에]. 다윗은 그가 도엑이 고자질 하고 있던 그때에이와 같은 시를 짓습니다. “오직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영히 의지하리로다.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시52:8-9). 다윗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자기는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님이 행하신다는 확신입니다. 모든 의는 주님께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선도 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멸망의 자식이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가운데 부어져서, 그것을믿는 믿음으로 의로와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풍성히 임하는 통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