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Kingship 4: 다윗의 시작(삼상16:1-13, 2016년5월29일 주일)
Kingship 4: 다윗의 시작(삼상16:1-13, 2016년5월29일 주일)

    오늘 본문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는 것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성경에서 기름을 붓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과 은사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왕이 기름부음을 받았고, 선지자들도 기름부음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울이 불순종해서 하나님은 그를 왕의 직에서 폐위시키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새 왕을 준비시키려고 하십니다. 새로 기름 부을 왕은 베들레헴에 이새라는 사람의 아들 중에 한 명을 골라 놓았다라고 성경은 밝힙니다(1절). 그래서 사무엘에게 기름을 뿔에 채워서 베들레헴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사무엘은 이새와 그 아들들을 보고자 합니다. 이때 이새의 아들들이 오는데, 가장 눈에 띈 사람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엘리압이었습니다. 엘리압이 얼마나 잘 생기고, 키가 컸던지 사무엘이 보자 마자 속으로 생각하길, “이 사람이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인가보다 라고 합니다 (6절). 
    사무엘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첫째,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의 자격에는 보편적으로 외모가 굉장히 중요시 되었을 수 있습니다. 둘째, 초대왕인 사울의 외모가 워낙 출중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에는 왕은 적어도 저렇게 생겨야 된다는 보편적 인식이 자리 잡았을 수 있습니다. 
    아뭏든 3000년 전 사무엘 시대에 이미 외모지상주의가 존재했습니다. 먼저 사울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이 더 잘 이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성경은 사울을 묘사하길,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삼상9:2). 새번역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었고…”라고 기록합니다. 사울은 최소한 오늘날 미남 배우를 능가하는 아주 잘생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키까지 큽니다. 성경은 보통 사람들이 사울의 어깨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말하자면 대략 보통사람보다 15인치 정도는 더 키가 컸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실제로 만나면 아마 하나같이 반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굉장히 열광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이제 정식적으로 백성들 앞에서 공인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옵니다. 삼상10장 말미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 지파대로 천명씩 나아오게 합니다. 그리고 제비뽑기를 했는데, 베냐민 지파가 뽑힙니다. 그리고 또 제비를 뽑는데, 마드리 가족이 뽑히고, 그 중에서도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힙니다. 결국 12,000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제비뽑기에서 뽑힌 사울이 결국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 확인 되는 순간, 사람들은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이질 않습니다. 알고 보니 사울이 짐짝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겸손이었는지, 두려움이었는지, 소심함이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의 순수함과 겸손함이었다면 오히려 사울이 왕으로 공식 등극하는데 훨씬 플러스 요인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그를 찾아서 데리고 나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을 백성들에게 이렇게 소개합니다. “주님께서 뽑으신 이 사람을 보아라. 온 백성 가운데 이만한 인물이 없다”(새번역, 삼상10:24). 그러고 나서 즉시 사람들이 외칩니다. “임금님 만세!” 
    여러분 우리는 사울이 왕으로 뽑히는 장면에서 자세히 읽다 보면 의문점이 생깁니다. 한나라의 왕을 뽑는 것인데, 그것도 역사상 최초의 왕을 뽑는데, 굉장히 일사천리로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오늘날 민주주의 방식이라는 것이 꽃피우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이리도 쉽게 백성들이 환호하면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외모가 한몫 했다고 봅니다. 사실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소개할 때 딱 한마디를 했습니다. “모든 백성 중에 이만한 사람이 없다” 이 한 마디에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사울이 키도 작고 볼품도 없게 생긴 사람이었어도 백성들이 이렇게 쉽게 ‘임금님 만세’를 외치면서 왕으로 수락을 했을까?라는 의심이 남습니다. 사울은 그가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잘생기고 가장 키가 큰 특출한 외모를 가졌기에, 왕으로 등극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되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보편적인 정서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런 정서를 바탕으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봐야 합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자마자 김칫국을 마시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 그러십니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절). 
    외모지상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신다고 합니다. 특히 외모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 이 말씀에 큰 위로를 삼는 것 같습니다. “그래 나같이 자유민주주의 형으로 생긴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셔” 마치 이 말씀이 잘 생긴 사람보다 못생겨도 마음이 착하고 바른 사람을 하나님은 더 귀하게 보신다라는 쪽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큰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일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가꾸지 못하면서 외모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요새 한국에서는 대기업에서 사원을 뽑을 때,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지 않거나 가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성적표는 아예 내지 말라고 합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온갖 스펙 쌓은 거(영어점수, 상 받은 거, 사회봉사, 유학 등)를 기록하지 말라고 한답니다. 이것의 의도가 뭘까요? 그 사람의 실력과 상관없이 사람을 뽑겠다는 것일까요? 아니죠. 오히려 반대죠. 진짜 제대로 된 실력을 보겠다는 뜻이지요. 이전에는 지원자의 실력을 성적이라는 수치로 뽑았다면, 이제 성적 같은 것으로 수치화 할 수 없는 개인의 보이지 않는 능력을 검증해서, 진짜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뽑겠다는 뜻이죠. 말하자면, “시험 성적 잘 내는 인재가 아니라 실력 있는 인재를 뽑겠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외모를 보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사람의 가진 것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이 “정말” 가진 것이 무엇인지 보겠다는 뜻이지요. 영어 성경에 보면, “the LORD looks at the heart” 마음 중심에 뭐가 있는지 보겠다는 뜻이지요. 렘20:12,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하나님"(the LORD who see the mind and the heart, NASB).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인간의 중심, 즉 마음을 궤뚫어 보시고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은혜이며 큰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굉장히 많은 능력을 선사하셨습니다. 사람은 혹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못한 능력 또한 과학을 통해서 그 한계를 많이 극복해 내었습니다. 사람은 하늘을 날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행기를 만들어서 새보다 더 높이 너 멀리 더 빨리 날아갑니다. 사람은 물속에서 10분 이상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잠수함을 만들어서 몇 개월씩 바다 속에서도 생활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력은 100마일 떨어진 손바닥 만한 물체도 보지 못할 정도로 약합니다. 그런데 천체 망원경을 만들어서 240,000마일 떨어진 달 표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도, 과학을 통해서 그 능력을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이것 만큼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과학을 발달시켜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재앙일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인간의 역사는 패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가장 먼저 남녀사이에 더 이상의 로맨스는 사라질 것입니다. 이미 상대의 마음을 다 아는데 무슨 알콩달콩한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부부사이는 더 멀어질 것입니다. 아마 지금보다 이혼율이 몇 배로 더 높아질 것입니다. 남편이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안다면 서로 대화가 필요 없지요. 그냥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부부가 미우나 고우나 서로 사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서로 진심이 뭔지 확인해서 일까요? 사실 그 반대죠. 정말 마음 중심의 진심을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같이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맍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면, 결국 나라의 경제도 엉망이 될 것입니다. 상대방의 수를 다 읽어버리는 데, 무슨 무역이 되겠습니까? deal이라는 말, negotiation이라는 말은 사라질 것입니다. 상대의 수를 벌써 읽어버리는 데, 누가 더 이익과 손해를 보는 데 뻔하게 보이는데 계약이 성사되지 않겠지요. 세상에 판사, 변호사, 검사라는 직업은 없어질 것입니다. 누가 유죄, 무죄 인지 다 아는데 그런게 필요없지요. 수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특별히 목사도 대부분 직업을 잃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멋진 양복을 입고 서 있지만, 여러분들이 제 설교를 듣는 동안 저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분명히 다음주에 교회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교회를 가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대부분의 교회는 문을 닫을 것입니다. 가게도 문을 닫을 것입니다. 기업도 문을 닫을 것입니다. 가정도 문을 닫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람이 읽을 수 있게 되는 순간 그것이 신용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불신사회로 만들어서 자멸하게 만들 것입니다. 
    마음 중심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우리의 속 마음을 사람은 볼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 보신다는 것 이것이 정말 감사할 거리지요. 만약 하나님마저도 우리의 속 마음을 보시지 못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정말 큰 불행이지요. 왜요? 우리가 속속들이 표현하지 않고, 잘 설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의 아픔과 상처를 모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시139: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요. 때로는 배우자도 알아주지 못하는 혼자만의 아픔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부모, 형제도 알아주지 못하는 혼자만의 쓸쓸함과 힘듦이 있습니다. 목사도 알아주지 못합니다. 그럴 때 유일하게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속속들이 살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힘들어서 기도마저 나오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져 주십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들 때가, 교인이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아파하는데 도와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입니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밖에는 없지요. 그래서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대상자를 만지십니다. 그래서 회복시키십니다. 그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습니다. 이번 주에는 교인 한 분이 제게 문자가 왔습니다. 본인이 지금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힘든 이유가 대 여섯 가지가 되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 지 모르겠다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리에 앉아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반나절이 지났을까요? 그 문제가 다 해결됐다는 연락을 해 왔습니다. 이것이 목사로서 얻는 일상의 기쁨이지요.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외모로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에는 나의 중심이 완벽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왜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실 때 도대체 무엇을 보시겠다는 것일까요? 나는 “성령 충만”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가장 최선의 적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령충만 외에는 없습니다. 
    12절을 보세요. 다윗의 외모를 표현합니다. 나는 이것이 다윗의 외모만을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령충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12절). 우리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겠다”(7절) 하나님 말씀을 읽다가 이 구절을 대하면 혼란스럽습니다. 결국 하나님도 잘 생기고 훌륭한 외모를 가진 다윗을 선택하신건가? 저는 랄프 클레인이라는 주석가의 표현이 마음에 듭니다. “다윗의 빼어난 외모는 그의 내적인 장점을 외적으로 표현해 주었다”(WBC, 사무엘상, p. 288). 다윗이 실제 잘 생겼을진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내면의 상태를 보여주는 외적 아름다움이라고 봐집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신자들은 외모가 잘 생겼던 못 생겼던 상관없이, 성령충만 할 때 얼마든지 그 얼굴은 빛나고 아름다운 얼굴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님의 사역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악하고 어두운 심령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악을 사랑하며 탐욕을 위해서 우리의 에너지를 쓰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새 일들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자정작용을 하십니다.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굳은 마음도 부드럽게 하시고,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비석 같은 마음도 녹이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아오게 하십니다. 
5/29/2016 5:41: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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