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Kingship 3: 순종(삼상15:1-35, 2016년5월22일 주일)
Kingship 3: 순종(삼상15:1-35, 2016년5월22일 주일)

    오늘 본문은 사울의 불순종에 관한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라고 사울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쳐서 이기라는 명령이 아니라, ‘진멸’하라고 하십니다 (3절). 본문이 ‘진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3절). 이 구절에서는 아이들과 젖먹는 아기까지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오늘날 독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불편해하고 의아해 하는 부분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무자비한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느냐? 라고 항변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출1장에, “아이가 태어나거든 나일강에 다 던져버리라고 명령한 이집트의 바로 왕과 뭐가 다르냐? 아니 그래도 바로왕은 아들이면 나일강에 던져버리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명령했는데, 하나님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했다면, 어쩌면 바로 왕보다 더 지독하신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아말렉이 어떤 민족인지, 그리고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말렉 족속은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의 손자 이름입니다 (창36:12, 대상1:36).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이고,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이므로 서로 형제관계의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 광야에서 처음으로 공격해 온 족속이 아말렉입니다. 이때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손을 들고 섭니다. 이때 모세가 피곤하여 팔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기고, 팔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는 양상이 됩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와서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히고, 양팔을 두 사람이 지탱해 줍니다. 그래서 결국 아말렉을 이기는 사건이 출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출17:16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아말렉이 도대체 하나님께 얼마나 크게 잘 못했길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까요? 출17:14을 보면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단호하신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하나님은 아말렉을 언젠가는 역사에서 지워버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와 같이 결심하실까요?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유를 밝히기를, 신25:17-18,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를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성경은 아말렉의 죄악상을 두 가지로 지적합니다. 1. 행군하는 출애굽 백성들 중에 피곤하고 지쳐서 뒤쳐진 약한 자들을 기습 공격을 했다는 것과 2.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사실 출애굽 백성들 중에 약해서 뒤에 쳐져서 따라오던 사람을 기습 공격했다는 사실은 도의적으로도 야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말렉의 꼼수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런 행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습공격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실 때 핵심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 나는 너희들을 지켜주겠다. 라는 내용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걸어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전쟁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켜줘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 중 가장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기습 공격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 백성들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에 있었던 과거사를 알고 우리는 오늘 본문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아말렉을 ‘진멸’하라 심지어 젖먹이 아이들까지 다 진멸하라는 명령은, 출17장에서 아말렉이 행했던 행위의 결과이며, 그 당시 하나님께서 맹세하셨던,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겠다”는 말씀을 지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런 단호한 하나님의 의지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면, 사울은 당연히 그 명령을 그대로 수행했어야 됩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생포합니다 (8절). 뿐만 아니라 양과 소의 가장 좋고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 그러면서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합니다(9절). 믈론 사울은 변명을 댑니다. "이 좋을 것들로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그랬다"(15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12절을 보면, "사울에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울의 말처럼, 정말 전쟁의 승리의 공로가 하나님께 있고, 그 영광을 좋은 전리품으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려 했더라면, 가장 먼저 자신의 기념비를 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념비를 쌓고, 제사를 드렸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운" 사건 하나만 보아도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그 전리품들 또한 자신이 취하기 위해서 진멸하지 않고 남겨 둔 것이라 밖엔 생각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 둔 것은, 제사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아각을 생포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긴 하되 자기의 관점에서 진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3절)라고 했는데, 사울은 앞에 명령,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는 빼먹고 “진멸하되”만 기억한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은 남겨두고 가치 없고 낮은 것만 진멸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존 비비어는 [순종]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울은 99퍼센트는 순종했다” 무슨 말입니까? 1퍼센트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불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약 사울의 순종을 백분율로 점수를 매긴다면, 제 점수는 0퍼센트입니다. 여러분 ‘순종’이라는 단어에 퍼센트가 존재한다고 하면, 순종이라는 단어는 이미 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적어도 성경적인 순종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순종”과 인간끼리 통용되는 “순종”의 기준이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순종은 어떤 경우에는 반만 순종해도 칭찬받기도 합니다. 저는 년 초에 저희 집 아이들에게 각자의 이름으로 선교헌금을 작정하라고 했습니다. 첫째, 교회에서 시행하는 것이니, 교회에 순종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빠로서 자녀들에게 교육상 이런 말을 할 때, 아빠의 말에 순종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조건을 걸었습니다. 작정헌금은 자기가 헌금을 내겠다고 작정하는 것이니, 너희들이 벌어서 헌금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둘이다 눈이 똥그래져서 묻습니다. 아빠 우리가 어떻게 돈을 벌어요? 제가 그랬습니다. 집안 허드렛일을 도와라. 설거지를 하든지, 집안 청소를 하든지, laundry를 하든지. 한번 할 때마다 50센트씩 주겠다고 했습니다. 큰 아이는 벌써 울쌍입니다. 자기는 10불을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50센트씩 벌어서 어느 세월에 10불을 채우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왜 그렇게 능력도 안되면서 많이 작정했냐? 그래서 제가 능력이 안되면, 금액을 다시 낮춰서 작정 해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조건을 내 걸었을 때, 저의 기대치가 어땠을까요? 이 아이들이 정말 1년 12달 동안 계속 집안일을 훌륭하게 수행해서, 전부 그 벌은 돈으로 작정헌금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했을까요? 아니요. 나는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100퍼센트 그렇게 할 거라고 기대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첫 달은 둘이다 설거지도 하고, 방청소도 하고, 론드리도 돕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3월쯤 되니까 뜸해지더니, 지금은 거의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화도 내지 않습니다. 왜요? 나는 처음부터 반만 순종해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계속 잔소리 해대면서 교육시키면서 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 사이에 통용되는 순종입니다.

    성경에는 순종에 대해서 많은 곳에서 명령합니다. 아내들여 남편에게 순종하라(엡5:24, 벧전3:1). 종들아 육체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엡6:5).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엡6:1) 등등 하나님은 수많은 순종을 말씀합니다. 이것의 기본적인 틀은, Lordship과 Kingship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의 틀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권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 제도권의 주재권(lordship)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벧전2:13)에서 명령하시고 계십니다. 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심지어 그 남편이 너무너무 못나도 왜 순종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시 가정의 제도권은 남자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원리로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도는 지상교회라는 제도권안에서 신앙생활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우주적(무형, 비가시적)교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불완전한 교회의 모습이긴 하지만, 하나님은 이 지상(유형, 가시적)교회의 제도권에 목사라는 직분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주님께서 주신 권위로 목회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목사가 가방끈이 길든 짧든, 말을 잘 하던 못하던 관계없이 모든 성도가 그 목사의 목양권 아래 들어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제도권이며, 그 속에서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은 어떨까요? 그냥 좀 순종을 하다가 나중에는 흐지부지 해도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은 절대적인 순종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에 절대성이 있다는 말은, 그 순종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값을 반드시 지불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 받았습니다. 그러면 행동 방식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순종하든지, 아니면 불순종하든 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는 대가를 “정녕 네가 죽으리라”(창2: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값은 죽음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순종의 절대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죽음 외에는 값을 치를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당장 죽나요? 죽지 않지요?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것을 유보하시지요. 그러나 그때부터 이 세상에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 죄 때문에 모든 인류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그 죄의 값을 치러야 되는데, 인생은 그 값을 치를 능력이 안되니, 하나님이 직접 치러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 불순종에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이 때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불순종 하셨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나 십자가를 못 지겠습니다. 다른 사람 찾아보십시오. 또는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까지 지고 올라가셔서 못에는 박히셨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너무 힘들어서 안 되겠다 싶어서, 십자가의 못을 스스로 빼고, 내려와서 자기를 못 박은 사람들을 순 십간에 다 날려버렸다면 어땠을까요? 십자가에서 죽지만 않았을 뿐이지, 채찍도 맞고, 십자가도 지고, 물과 피도 쏟았고,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통을 당했으니 99퍼센트는 순종한 것 아닙니까? 그 정도만 해도 신이신 예수님이 할 만큼 하신 것 아닙니까? 그 정도만 해도 아담이 불순종한 것을 만회 할 만큼 값을 치른 것 아닐까요?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주님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할 때, 그것은 죽음으로 순종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왜냐햐면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말씀에서 밝히듯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보내어진 목적은 "죽기"위함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믈 예수님께서 하신 순종은 결국 “죽음”으로만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하나님께 대하여 순종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순종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순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99퍼센트 순종을 하고도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지 않으시고 그러다가 그냥 슬며시 십자가에서 그대로 살아서 걸어내려 오셨다면, 그것은 이미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인류의 모든 불순종의 죄를 담당하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이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함으로, 십자가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대개의 반응은 뭘까요?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만 명령하십시오!” “주님, 제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제가 모든 사람은 사랑할 수 있겠는데, 제 남편만큼은 사랑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모든 사람은 용서 할 수 있겠는데, 딱 저 한 사람만큼은 힘드니 좀 눈감아 주십시오””주님 다른 명령은 다 지키겠는데,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은 도무지 못 지키겠습니다. 저는 돈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여러분 만약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처럼 그렇게 온갖 핑계를 대면서 못하겠다고 그러고, 예외 사항을 두셨다면 어땠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을까요? “아버지여,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겠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태길 저 친구를 위해서는 도무지 십자가를 못 지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만세 전부터 하나님은 김태길을 이미 하늘의 생명록에 기록해 두셨는데, 김태길만을 위해서는 십자가를 못 지겠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탈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순종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순종을 요구합니다. 절대성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또한 반만 하고, 반은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바보같이 묵묵히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좀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그저 신자 됨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는 어떤 면에서 세상보다 불합리적으로 보이는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누군가가 만약 교회가 왜이리 비상식적이냐? 교회가 왜이리 세상제도보다 더 낡았느냐? 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같이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게 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가장 상식은 무엇입니까? 나는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나도 걸어 가겠다는 자기 고백입니다. 그러면 겸손히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께서 교회를 보시면서 가장 아파하실 부분이 뭘까요?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은 너무너무 많은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어느 교회 교인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널렸는데,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이것 같이 불합리하고, 이것 같이 상식 밖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최소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에는 순종하십시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 순종하십시오. 
5/22/2016 6:27:00 PM

There is no comment yet...
의견 등록을 하시려면 로그인 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