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Kingship 2: 빼앗긴 하나님의 궤(삼상5:1-12, 2016년5월8일 주일)
Kingship2: 빼앗긴 하나님의 궤(삼상5:1-12, 2016년5월8일 주일)

    오늘 본문은 블레셋에게 하나님의 궤가 빼앗긴 것에 대한 본문입니다. 본문에서 계속 등장하는 하나님의 궤는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불립니다. 요즘 궤라는 말을 잘 쓰지는 않지만, 어릴 적 시골에서 조그만 나무상자를 궤짝이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사과상자는 얇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을 사과 궤짝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언약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상징물인 상자였습니다. 그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십계명 돌판 두 개,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 이 세가지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들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상징물이었습니다. 이 언약궤가 전쟁 통에 이방민족에게 빼앗겼습니다. 

    빼앗긴 과정이 삼하4장에 나옵니다. 어느 날 블레셋과 전투가 치러집니다. 그날 이스라엘이 집니다. 전사자가 4천명 가량이 발생합니다. 사실 당시 블레셋과 전쟁을 해서 이긴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블레셋은 오래 전 지중해의 크레타 섬 또는 근방의 해양족으로 봐 집니다. 그들은 이미 BC 12-13경에 지중해 지역에서 맹위를 떨치다가 이집트마저 삼키려다 실패하고 팔레스틴 지역에 정착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중요 거점에 적어도 5개의 도시, 가드, 가사, 에그론, 아스글론, 아스돗을 건설해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철기를 사용했고, 철제 무기를 가진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블레셋과 전투에서 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작전계획을 세우는데, 실로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23마일을 옮겨와서 이스라엘 전장터로 갔다 놓는 것이었습니다. 삼하4:3,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언약궤가 철제 무기로 무장한 블레셋을 이기게 해 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대로, 언약궤는 그냥 궤짝입니다. 길이는 약 100센티미터, 폭과 높이는 약 70센티미터 정도 되는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이며, 그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나무지팡이, 돌판 두개, 항아리 하나가 다였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믿음에 근거한 행동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냥 자기들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습니다. 언약궤만 전쟁터에 갔다 놓으면, 그것이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나 뜻을 묻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냥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의 상징물이 움직이니까 그것에 맞춰서 장단을 맞춰서, 전쟁의 신으로 용맹하게 활약을 해서, 이방의 전쟁의 신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완전히 졌습니다. 보병 삼 만 명이 전사했습니다(삼상4:10). 그들은 법궤를 갖다 놓으면 하나님이 움직여 줄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행위였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공리주의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 중에 정말 많이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 안에 “공리주의”가 판친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는 “행복을 극대화” 해야 한다는 19세기에 시작된 사조입니다. 개인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가장 합당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의 가장 문제는 행복과 쾌락을 결정하는 데, “다수의 사람”이 가장 우선됩니다. 그래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를 들면, 태평양을 건너던 배가 가라앉습니다. 그때 조그만 구명보트에 네 명이 탑니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다 죽을 판입니다. 이때 마침 한 명이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많이 마시고는 몸에 탈이 나서 구명보트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때 나머지 세 명이 의논합니다. 어차피 이 친구는 가망이 없어 보이니, 이 사람을 희생해서 우리라도 살자고 약속하고서는 죽입니다. 그리고 그 인육으로 두주를 버티다가 결국 구조선에 의해 구조가 됩니다. 이 일은 1884년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때 약한 한 명을 죽여서라도 세 명이 살수 있다면 그것은 괜찮은 결정이라고 하는 공리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문제는 뭡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뺏어도 양해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야 할 생명에 대한 판단과 권리를 사람이 한다는 것이죠. 이런 사상이 기독교 신앙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면 일어나는 문제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이 됩니다. 나는 대학교 시절에 학교 캠퍼스에서 SFC(학생신앙운동)이라는 선교단체에 속해서 활동을 했습니다. SFC에서 매주 모임 때마다 외우는 SFC강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교리문답을 우리의 신조로 한다……우리의 생활원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기에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 중심이 뭘까요? 공리주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신자 개인의 행복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의 본질이 나의 쾌락이나 유익이나, 건재함이나 성공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믿음은 신본주의죠.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우선으로 삼는 삶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개인의 삶을 상상할 수 있나요? 그런데 삼상4장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의 손자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고서는, 삼상4:22에서 이와 같이 밝힙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나님의 궤사 왜 뺏기게 되었나요? 그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구로 전락시키려는 공리주의, 인본주의 때문이죠.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한 번 지고는 그들이 모여서 곧바로 한 것이 무엇인가요?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와서 기도 드렸나요? 아니요.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냥 자기들의 판단대로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전쟁터로 옮겨옵니다. 여기에는 치명적인 불신앙이 있습니다. 언약궤의 사유화입니다. 언약궤를 우리가 결정해서 가져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저 형편없는 블레셋의 다곤 신 따위는 금방 이겨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불신앙이 뭡니까? “하나님의 사유화 현상”입니다. 내가 결정해 놓고 하나님보고 해 달라고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 결정 후 통보입니다. 그게 오늘날 기도랍시고 하는 신자들이 허다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해 놓고서는 사실은 통보 수준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본주의죠.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인간이 주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유화 현상은 마치 알라딘 램프의 주인이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의 신이 나와서 주인님 내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하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소원은 인간에게 있고, 그 소원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이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상4:3에 보면, “그것으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여기 “구원하게 하자”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쉬에누”라는 사역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주체가 사람이 되고, 객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사유화해서 내 맘대로 움직여 보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서울에 모교회는 3,000억 짜리 예배당을 짓고는, 입당예배를 드리는 날 큰 배너를 달았는데,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3,000억짜리 예배당을 지어놓고,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현수막을 달고, 찬양과 감사의 예배를 올려드리면, 정말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됩니까? 성경에서 기록하는 하나님을 조금만 들여다 볼 줄 안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타락할 때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 교회당을 으리으리하게 짓는 것이었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를 조금만 뒤져보면 나옵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됩니까? “하나님의 사유화”죠. 

    
    신자들이 많이 오해하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이 말씀을 오용하는 사람들은 대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라는 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뜻하시지 않은 사람의 계획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신다라고 믿습니다. 틀린 해석입니다. 요9:31을 보세요.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 우리가 아나이다.” 

    여러분 인생은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십니다. 내가 인생의 왕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허락 없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인생의 길을 계획하고 어떤 것을 결정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바라시는 바른 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계획을 세워놓고, 마치 그것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사람은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 말은 우리 뜻대로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뜻대로 살다가는 인생 망치고 실패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유화해서, 하나님을 이리 부리고 저리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분 뜻대로 마음먹은 대로 다 되었나요?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신입니다. 저는 제 인생이 제 뜻대로 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꿈이 군대 장군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병장 제대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육해공군의 장군은 못됐어도, 하나님의 군대의 장군 같은 목사를 하고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 뜻입니다. 제 아내는 꿈이 간호사였답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못됐습니다. 그런데 대신 대학병원에서 의대 학장님 비서로 근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르게 꿈을 이루어 주셨지요. 제 아내는 이상형이 손석희 앵커랍니다. 제가 어딜 봐서 손석희 앵커와 닮았습니까? 제 아내는 자기의 이상형과 결혼하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손석희씨와는 하나도 안 닮았지만, 그래도 말하는 직업이라는 측면에서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뜻과는 완전히 다르게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왕은 너희가 아니라 나(하나님)라는 것이죠.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인생의 왕좌에서 내려와서 그 자리에 하나님을 앉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의 왕이시며 주인 되신 분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분별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 분별력을 갖는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할 때 가능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갖 세상 것들을 다 사랑하고, 온갖 세상의 원리들을 다 따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는 참 힘이 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의 눈으로는 도무지 만날 수 없는 분입니다. 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완전히 육적인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도모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가는 곳 마다, 이방 신을 박살 내는 장면입니다. 본문을 보니 빼앗긴 언약궤가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에 세 곳을 거쳐 갑니다. 그 중에 첫 번째 안착한 곳이 아스돗이었습니다(1절). 아스돗에서 그들이 섬기는 다곤 신전에 언약궤를 모셨습니다. 다곤은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반인반어—반은 물고기, 반은 사람모양을 한 것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 신전에 언약궤를 두었는데, 다음 날 보니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고, 머리와 손목이 부러져 있고, 몸통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아스돗의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는 언약궤를 가드로 보냅니다. 그랬더니 가드에는 독종이 퍼져서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가드 사람들은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냅니다. 거기에서도 똑 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저 블레셋의 우상신을 이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힘이 없어서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뺏기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결과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블레셋을 충분히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첫 전투 에서 사천 명이 죽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전투에서 삼만 명이 죽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치 아무 힘도 없는 분 처럼, 아무 능력도 없는 분 처럼 끌려가서 이방신 앞에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이 돌이키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서 진정한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인생의 유일한 주시며 왕이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그런 수치를 통해서라도 보여 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을 결국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을 힘없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셨던 것은 그분이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산 위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쳐대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할 만큼 죄가 많아서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내려올 수 없는 한낱 연약한 인간이라서 그렇게 가만히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충분히 십자가의 못을 빼고 내려와서 왕으로 군림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담당하셨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단 한 명의 죄인도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면, 온 인류가 수치와 사망 아래에서 죽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예수님께서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모든 하나님으로서의 명예를 다 빼앗긴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부활하심으로 이기시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죄악 가운데 영원히 죽음으로 멸망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대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명의 왕이요, 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궤가 이방의 압제아래 잠시 빼앗기게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결국 승리하실 것이며, 결국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5/8/2016 10:18: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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