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Kingship 1: 선지자 사무엘(삼상3:19-4:1, 2016년5월1일 주일)
Kingship 1: 선지자 사무엘(삼상3:19-4:1, 2016년5월1일 주일)

    오늘부터 7주간에 걸쳐서 사무엘상을 설교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움 받는 것에 대해 공포합니다. 본문 20절,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었다….”라고 기록합니다.
     성경에 보면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인류와 소통하시려고 할 때마다 선지자를 세우십니다. 선지자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하는데, 하나는 백성들을 대변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 드리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창20:7,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두고 그러십니다.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우리는 대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같은 사람은 족장시대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꼽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을 족장이라는 단어 써서 표현하지는 않지만, 선지라라고 기록합니다. 
    또 하나 더 중보 기도하던 선지자의 예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나서 실망하고 돌아와서 당장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출5:22).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는 백성을 대변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선지자의 두 번째 중요한 역할은, 이제 반대로 하나님을 대변하여 백성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신18:18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하나를 세워서 그 입에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두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은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으시어 전하는 신적이고 절대적인 말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쓰신 무수히 많은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는 이름이 기록된 선지자들도 있지만, 기록되지 않은 선지자들이 더 많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명시된 최초의 선지자 에녹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유다서 1:14에 보면,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봐서, 성경 최초의 선지자(예언자)는 에녹으로 봐 집니다. 그러나 사실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선지자 무리들이 성경에는 많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 상만 하더라도 익명의 선지자 무리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사무엘의 예언대로 선지자 행렬을 만납니다.(삼상10:10) 그리고 후에 다시 한번 더 만나게 됩니다. (삼상19장). 열왕기하 2장에도 보면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선지자 생도들이 많이 있었음을 기록합니다. 심지어 엘리야가 승천하는 장면을 선지자 생도 50명이 지켜봤다고 성경은 기록할 정도로 선지자가 신학교에서 전문적으로 양성되어지던 때가 있었던 것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시대마다 선지자를 세우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세우십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21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 (He revealed himself to Samuel through His word.) 영어 성경에 보면, reveal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Reveal은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시하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계시의 의미가 뭘까요? 보통 계시는 미래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칭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어문적인 풀이이지, 궁극적인 성경의 의미가 아닙니다. 궁극적인 의미는 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시 하십니다. "너는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할 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그 언약의 자손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며,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 나가실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신실하심, 긍휼, 자비, 사랑, 은혜, 구원하시는 하나님 등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의미는, 드디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하심으로 보이지 않던 것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의미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다가 이제서야 말씀하실 때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읽지 않은 본문 삼상3:1 보세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라고 기록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한참 동안 침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침묵하실까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낮잠을 주무시거나 귀찮아서 세상이 맘대로 돌아가도록 하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싫어하고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듣지 않는 것에 침묵하신다는 것은 할말을 잃었다거나 어찌할까 고민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48: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서 참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때 그때 우리를 처벌하시고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벌써 수천 수 만 번이라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침묵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지키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아이들이 아빠와의 약속을 어기고 불순종하면 처음에는 몇 번이고 지적합니다. 그러다가 계속 듣지 않으면 저는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참습니다. 아이파드와 테블릿 사용을 평소에는 숙제와 관련된 것 외에는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말에만 2시간씩 쓰게 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슬쩍슬쩍 그 약속을 어기고, 안 보일 때 그냥 합니다. 처음에는 몇 번 지적합니다. 엄포를 놓습니다. 그리고 몇 번 그러고 나면, 그냥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때를 기다립니다. 저 같은 경우는 주로 성적표 나오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을 빌미로 해서 성적이 내려가면 모든 혜택을 몰수 합니다. 그러니까 수개월간 아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그때 그때마다 지적하고 처벌하고 싶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더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맞는 자식보다 매 드는 부모가 더 아프다는 것을 부모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땐 야단 맞으면 부모를 잠시 미워하기도 하고, 빨리 어른이 돼야지 하는 그런 생각도 했는데, 막상 부모가 되어보니 야단치는 부모의 마음이 훨씬 괴롭고 힙듭니다. 한번 야단치고 나면 에너지가 다 빼앗겨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초보 아빠일 때는 매번 잘 못한 것이 있을 때마다 야단을 쳤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냥 알고도 모른 척 하고 넘어갑니다. 왜요? 그것은 자식을 위한 교육학적인 배려도 있긴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한 것도 있습니다. 그래야 저를 지킬 수 있겠더라고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자신을 드러내시고 나타내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말씀입니다. 주일 설교강단과 개인묵상이나 큐티를 통하여 성경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십니다. 간혹 신자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제발 저에게 한번 나타나 주십시오. 꿈에라도 좋으니, 좀 나타나서 제게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지금 저는 주님을 만나서 대화도 하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어떤 분은 간밤에 꿈에서 예수님 만나고 싶어서, 집에 결려있는 예수님 초상화를 보고 잔다고 합니다. 우리가 늘 보는, 상상화인 예수님의 얼굴은 금발에 얼굴이 하얗고, 긴 장발에 약간의 콧수염과 구레나룻에 서구형 미남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만나면, 꿈속에서 만나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일전에 영국 BBC방송에서 고고학자, 법의학자, 인류학자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예수님의 초상화가 나왔는데, 서구형 미남과는 완전히 거리가 멉니다. 얼굴은 정말 목수 같이 구리빛이고, 머리카락은 완전히 타잇트한 곱슬이고, 구레나룻이 있고, 눈이 튀어 나올 듯이 똥그랗습니다. 그냥 동네 옆집 아저씨같이 생겼습니다. 학자들은 게다가 예수님 당시 셈족 남성들의 평균키가 155센티에 몸무게는49.5킬로그램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볼품없는 사람입니까? 이게 사실에 가까운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인간적인 이상형의 모습이 아닐 것이라는 것에 무게가 갑니다. 
    만약 이런 평범한 모습의 예수님을 만난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별로 꿈에서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탐심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보암직도 하고…”(When the woman saw…it was a delight to the eyes…”
     사람들은 악해서 눈으로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눈으로 본다는 것에는 굉장히 큰 위험성이 있습니다. 선입견입니다. 좋아 보여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 눈에 보기에 좋지 않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눈에 보기 좋으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은 사실 실체가 아니라, 껍데기 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왜곡되기도 하지요. 

    사실 우리가 주님을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만나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주님 자신이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장 1절을 보세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에서는 두 가지를 동시에 알려줍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시며, 또한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로 존재하십니다.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서로 헷갈리지도 분리되지도 섞이지도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삼위 하나님은 말씀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출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뵙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그럽니다. 이제 내 백성에게 가서 이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시리라. 그때 모세가 묻죠.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면 제가 뭐라고 답할까요? 그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3:14)영어 성경에 보면, I am who I am.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 보면, “나는 곧 나다”라고 기록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번역이 굉장히 와 닿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 하나님의 대답은, “000”같은 사실 이름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 “존재방식”을 알려주십니다. 그냥 나는 나다. 
   이 “나는 곧 나다”라는 하나님의 대답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하거나 비유할 수 없는 특별한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인격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만약 어떤 볼 수 있는 실체로 묘사해 버린다면, 그분은 키가 크시고, 인자하게 생기셨고, 구레나룻이 있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어깨가 넓으며, 피부가 노르스럼하고….등등으로 묘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라 그런 표현은 할 수가 없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거나 경험했던 적이 있는 어떤 물리적 방식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할 때 가장 적합한 존재방식은 바로 말씀입니다. 


    자 그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나타내시려고 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왕되심”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통치권이죠. 오늘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다가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세우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유일한 왕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사실 사무엘이 등장하기까지 약 450년간 사사시대가 있었습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런 구절이 계속 등장합니다. “그때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보면 왕정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사사기가 왕정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살았나요?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려고 하는 것은, 정말 정치적인 왕이 없어서, 사람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항상 왕은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변함없이 통치하고 계셨고, 그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실수없이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왕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왕이 아닌 것처럼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 왕을 요구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 요구대로 왕을 세워주려고 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에 왕정 시스템이 도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왕을 세우실 때, 그냥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를 먼저 세우시고, 그 선지자의 지시대로 왕을 세우게 하십니다. 그 선지자가 바로 사무엘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무엘은 사사시대의 마지막 사사이기도 하지만, 이제 좀더 전문화되고 제도화 된 선지자 시대의 문을 연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는 항상 왕을 지켜보고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왕이 올바르게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도록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사울을 세우고, 다윗을 두 번째 왕도 세우는 king maker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는 또한 초대왕 사울을 폐위시키는 king breaker 역할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서,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왕정시대가 도래하면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시작으로, 계속적으로 선지자 시스템을 가동하셔서, 선지자들을 통해 인간 왕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 흐를 수록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왕 도합 39명의 왕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의 권위가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어집니다. 그러고는 인간 왕들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무시하고, 자신들이 세운 선지자들을 가지고 우상을 섬깁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합왕입니다. 그는 시돈 왕 헷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 하면서, 이방 바알신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둔 850명 이상의 바알 선지자들을 내세웁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의 선지자 말살정책을 폅니다. 그러면서 북 이스라엘은 점점 하나님의 말씀이 황폐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유다의 왕 아하시아에게 시집보냅니다. 그러고는 바알도 함께 딸려 보냅니다. 이렇게 하여 남 유다 또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짓밟힙니다. 이것이 구약의 선지자들에 대한 왕들의 타락상입니다. 결국 구약시대의 선지자 제도는 타락한 왕들에 의해서 무시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마지막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소교리 문답시간에 배웠듯이, 그리스도의 삼중직인 왕직, 제사장직, 선지자직이 있습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시키려 하십니다. 앞서 초두에서 말씀드린대로, 선지자직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무엇입니까? 중보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범죄한 인류의 가장 효력있는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마지막 선지자가 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결국 그 말씀을 우리가 듣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5/1/2016 8:35: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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