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3: 아사셀 염소(레16:6-10, 20-22, 2016년4월24일 주일)
몇 년 전에 한국에 가축 전염병인 구제역과 AI라고 하는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해서, 전국의 돼지, 소, 염소, 사슴, 닭, 오리 750만 마리를 살처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 99퍼센트는 예방 차원에서 전염병 발생 농장 주변의 의심 가축들을 살처분 한 것입니다. 병들지 않은 수많은 가축을 죽이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생명이죠. 수천만이나 되는 더 많은 짐승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실 땅에 묻으면 대부분 전염병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끔 그것이 지하수로 흘러 들어가서 물을 오염시키고, 다시 전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각 나라마다 원자력 발전소들이 있는데, 핵폐기물들이 생깁니다. 그것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특수용기에 밀폐하고, 특수하게 만든 터널이나, 지하창고에 묻어버립니다. 어떤 핵폐기물은 몇 년 만에 방사능이 없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폐기물은 수십 만년간 사라지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하니 핵이 인류에 유익하기도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오염된 어떤 가축이나 물질은 인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오염원이 인간 세상을 오염시켜서, 죽음의 세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은 이런 오염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들은 그것이 바쳐지기 전에는 가장 정결하고, 깨끗하게 구별된 것이라야 됩니다. 그러나 예배자가 그 제물에 안수하는 순간, 그 제물은 더 이상 깨끗하지 않습니다. 그 제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부정한 짐승이 됩니다. 그래서 레위기 제사법에서는 그 안수 받은 짐승을 죽이고, 물에 깨끗하게 씻고 난 후, 반드시 불에 태우는 과정을 가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진에 존재했던 죄의 오염원을 폐기 처리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일시적으로 이스라엘 진영은 오염원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런데 오늘 레위기 16장 본문에서는 아주 특이한 오염원 제거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아사셀 염소”입니다. 아사셀 염소는 죽여서 태우는 방법으로 오염원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산 채로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10절). 그것은 염소를 멀리 광야로 떠나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10절, 22절). 마치 방사능 오염물질이 그대로 살아 있는 폐기물을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리 방출시켜서, 묻어버리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8절, 10절)라고 할 때, 아사셀이 뭘 말하는 것인지 살펴봅시다. 이 아사셀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유일하게 레16장에만 등장합니다. 그리고 딱 4번 쓰였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아사셀"이라고 히브리어 단어를 거의 똑같이 옮겨놓았습니다. 잘 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기있는 3대 영어 성경인, NIV, NASB, KJV에서는 scapegoat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저 제물로 바쳐지는 염소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아사셀이라는 단어를 번역해서 씀으로 해서, 본래 성경에서 가진 깊은 이면의 뜻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ESV 성경에서는 Azazel이라고 히브리어 성경원어를 그대로 음역표기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 아사셀이 명확하게 뭘 하는 것인지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에 대해 크게 3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1. 아사셀이라는 히브리어적 어원이 “떠나는 염소”라는 뜻이라는 주장입니다. 아사셀로 번역된 이 단어는 본래 히브리어 발음으로는 “아자젤”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 ‘아즈’(염소) + ‘아잘’(멀리 가다)라는 합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맞다면, 성경 구절의 문장이 어색해집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낸다라고 세 번씩이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 10절). 이렇게 되면 아사셀 자체가 “떠나는 염소”라는 말인데, “떠나는 염소” 자기 자신을 위하여 광야로 보낸다”라는 말이 됨으로 납득하기가 힘들게 됩니다. 말하자면 염소 자기 자신을 위하여(for), 자기에게(to) 자기를 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 아사셀은 장소라는 것입니다. 이곳은 “거친 바위 산”이라는 뜻의 아람어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바위투성이의 낭떠러지가 있는 곳으로 염소를 보내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2절에 보면 “무인지경”이라고 되어 있는데, 새번역에서는 “황무지”로 번역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황무지라고 해서 다 바위가 많은 장소라고 할 수 있느냐? 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3. 아사셀은 광야에 사는 악귀의 이름이거나 혹은 악마 자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체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선호하는 해석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러 군데에서 광야가 귀신이 출몰하는 지역으로 묘사합니다. 눅11장에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24절)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봐서 귀신이 활동하던 지역이 물 없는 광야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금식기도하실 때 사단으로부터 유혹받은 곳이 바로 광야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광야에서 출몰하는 악귀의 이름을 아사셀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각 지역 마다 대표하는 악귀의 이름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바다 괴물인 “리워야단”을 사27:1에서 언급하는데, 그것을 “꼬불꼬불한 뱀”이라고 상세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봐서 이것이 실제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징적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성경은 어떤 악한 영적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성경에서 이런 영적 세력의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봐서, 실제하는 영적 실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이 해석에 약간의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아사셀을 위하여”라고 세 번씩이나 성경이 표현한다고 해서, 이것이 광야의 귀신을 위해 바쳐지는 제사나 선물의 의미로 보내는 염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광야의 귀신인 아사셀에게 염소를 보낸다는 것은, “다시 돌려 보낸다”라는 의미입니다. 죄의 출처인 마귀의 집단에게, 그 죄를 염소에게 실어서 다시 그 출처로 돌려 보낸다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돌려보내진 죄의 오염원은 다시는 돌아와서는 안됩니다. 한번 떠나 보낸 그 오염원은 이제 영원히 예배자를 떠났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면 안됩니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예배자는 그 오염원을 찾아서 가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오염원이 돌아와도 안되고, 예배자가 그 오염원 쪽으로 가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습니다. 430년간 종살이 하던 이집트 땅을 떠날 때, 그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지하여,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광야로 이끌림을 받아 나왔습니다. 이집트 땅을 떠난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예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떠나야만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는 온갖 우상과 이방신들의 집합소였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에는 너무 너무 많은 우상과 이방신의 죄악의 오염지였습니다. 그들은 그 오염의 근원지를 떠나야만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땅에서 그들은 예배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출애굽한 것이 예배하기 위하여라고 할 때, 그들의 예배를 위한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이 지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거룩한 곳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곳도 여전히 가나안 7족속이 온갖 우상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자 마자 우상을 섬기는 이방 족속들을 물리치는 일부터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오염원을 제거한 후에야, 그곳에서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땅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거룩한 땅은 어떤 곳이 거룩한 땅입니까? 그곳은 하나님께서 머무시고, 함께 하시는 곳이라야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예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광야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경계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본래 앞서 말씀 드린 바대로, 악귀가 설쳐대며 쉴 곳을 찾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은 "진"이라는 대형을 통해서 거룩한 경계를 세우십니다. 정확히 동서남북으로 네 등분을 하여, 열두지파의 대형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 진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거룩한 경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 바깥은 출애굽 때 따라나온 "중다한 잡족"으로 표현된 이방인들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예배할 수 없는 부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진" 안에 머물면 그곳은 거룩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열두지파 대형의 그 맨 중앙에 성막이 세워집니다. 그곳은 좀더 거룩한 곳입니다. 그리고 성막에는 성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곳은 더 거룩한 곳이 됩니다. 그리고 그 성소는 지성소라는 가장 거룩한 곳이 휘장에 의해서 구별됩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가장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또 경계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지성소 안의 연기와 구름으로 가리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경계지으시는 모습입니다. 그 경계는 시내산에서 십계명 돌판을 받을 때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가장 높고 고귀한 거룩을 그렇게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나오셔서 하셨던 일은, 그곳이 거룩한 땅이 되게 하시고, 그 거룩한 곳에서 예배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광야에 나오자 마자, 물과 음식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이집트를 그리워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집트로 다시 돌아 갔다면, 그들은 더 이상 예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염원으로 다시 들어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구별된, 거룩한 곳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거룩성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러면 예배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예배한다는 의미는, 이제 신자가 어떤 거룩한 곳을 통해서 예배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장소적인 거룩이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자 개개인은 자신의 몸이 성전이 되어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의 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으므로(고전3:16)이제 신자가 가는 곳이 거룩한 곳이며, 신자가 서는 곳이 바로 거룩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몸으로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자가 되어 예배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오염원으로 가까이 가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거룩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 나서도, 여전히 먼 나라에서 돼지들 틈에서 쥐엄 열매를 얻어 먹는 것을 그리워하고 실제로 그렇게 돌아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거룩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배에 이미 올라 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이제 그 배를 타고 구원의 여정을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여정은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내가 내리고 싶다고 해서 내릴 수도 없습니다. 점점 더 죄의 오염원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러나 여전히 옛 습성으로 인해 갈팡질팡 할 때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얻은 구원은 절대 인간의 나약함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구원을 완전하고도 영원히 효력있게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거룩하지 않지만 거룩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제 받아들이려고 하거나, 이제 막 받아 들인 사람들이 염려하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다 버려야 하지 않는가? 죄짓는 것은 멀리해야 하지 않는가? 라는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맞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쁨이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전의 가치와 즐거움은 이제 아사셀 염소처럼 멀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성이 요구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말 세상과 단절되고, 이제 인생의 행복과 기쁨은 끝났다는 의미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인생의 즐거움과 가치가 생겨났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옛날의 가치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나는 지금 제 아내와 연애를 3년 반 동안 하고 결혼했습니다. 이제 둘이서는 결혼을 약속하고, 제가 아내의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야 되는데,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하니까 교회 집사이신 장모님이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였습니다. 목사는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과 사모는 교회에서 기도 못 펴고 살아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딸 고생길이 훤하게 보여서 목사 사위에게는 못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따님을 풍족하게는 못해줘도 굶기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21세기에 밥을 못 먹어서 굶을 사람이 대한민국에 어디 있을 거라고…
나는 목사이기 전에,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합니다. 그 행복은 돈이 많아서도, 좋은 집에 살아서도 아닙니다. 나는 지금 9년째, 지은지 30년도 넘은 방 두 칸 짜리 아파트에서 삽니다. 그런데 이 집에 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 좁은 집에 보내 주셔서, 며칠씩 또는 몇 달씩 묵고 가게 하시는 지요. 그 동안 약 스무 팀 이상이 우리 집에서 짧게는 일주일, 또는 이주일, 한달 씩, 그리고 두 번 정도는 석 달 씩 머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 한번도 돈을 받아 본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유료 홈스테이를 받아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는 집을 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 집이 홈스테이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의 집이 아닙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을 집안에 맞아들이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 것이 그냥 삶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이 하나님이 저희 가정에 주신 은혜이자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시리라”(신14:29)고 약속하셨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많이 주십니다. 그것은 자족의 복과 건강의 복,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복을 주십니다. 최소한 저에게 있어서 복의 개념이 더 이상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있지 않습니다. 그저 영적이고 성경적인 복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 믿으면서, 돈이 적거나 형편이 어려워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 해 본적이 없습니다. 왜일까요? 저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드리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5-26).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시78:24). 이런 약속의 말씀들을 그냥 단순하게 믿어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은행 어카운트에 돈이 딸랑딸랑 해도 사실 별로 겁이 나질 않습니다. 설마 하나님이 굶겨 죽이시겠습니까? 배짱이 생깁니다. 이것을 성경적인 용어로, “믿음”이라고 그럽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세상 사람들이 견디기 힘들어 하고, 직면하기 싫은 환경이나 상황이 사실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왜요? 가치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치는 세상 물질에 있지 않고, 세상 연락에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집을 이사해야 하거나, 내 집을 마련하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일해서 번 것으로, 노후를 대비하고 집을 마련 하는 것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가 되게 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것은 그냥 하나님이 주시는 복 안에 끼워져 있는, 조그마한 선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물질세계에서 움켜쥐어야 하는 복의 가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초월하는 복입니다. 세상 가치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고, 자족하게 되며, 환경이 더 이상 나의 생각과 마음에 짐을 지우지 않게 되는 마음의 평안,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게 되는 최고의 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도무지 손 쓸 수 없는 깊고 깊은 죄악의 문제가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히 씻음 받았습니다. 어떻게요?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아사셀 염소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 지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21절 보세요.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두 손으로 안수 했다는 말은 “죄의 이동”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예배자의 죄와 예배자가 중보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가 그 안수를 통하여 염소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염소는 홀로 그 죄의 짐을 지고, 먼 길로 가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를 홀로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의 오염원이자 본거지인 사단의 사망의 나라에까지 가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죽어야 되지만, 대신 사망의 골짜기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아사셀 염소에게 두 손으로 안수하여 먼 길로 홀로 떠나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일들을 끝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거룩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