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2: 정결과 부정의 규례(레11:44-45, 2016년4월17일 주일)
레 11장부터 16장까지는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들에 대한 규례를 기록했습니다. 그 첫 번째 규례에 해당되는 본문이 레11장입니다. 레11장에는 음식물 규례입니다. 이 음식물 규례를 먼저 생물학적으로 크게 4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땅의 짐승, 2. 물고기, 3. 새, 4. 곤충. 그러고는 이것을 다시 영적인 카테고리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1. 정결한 것, 2. 부정한 것. 쉽게 말하면 정결한 것은 먹을 수 있고, 부정한 것은 먹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영적인 분류, 즉 정결한 것(먹을 수 있는 것)과 부정한 것(먹을 수 없는 것)의 기준이 뭘까요? 학자들은 대게 4가지 정도의 이론을 제시합니다.
첫째, "임의적" 이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준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 마음대로 임의적으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순종하여 지키는지 아닌지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제의적" 이론입니다. 정결한 동물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려면, 절대 이방신의 제물로 드려지지 않는 것이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송아지 같은 경우는 이미 애굽이나 가나안 신들에게 바쳐지는 동물이었습니다. 더우기 출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방 우상을 섬기듯이 했던 행태들을 볼 때, 송아지가 다른 신에게 드려지지 않았기에 정결하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셋째, "위생적" 이론입니다. 동물이 사람에게 위생적으로 해를 끼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돼지는 토사광란을 일으킬 수 있고 토끼는 야토병을 일으키며, 비늘,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는 진흙속에 들어가서 나쁜 박테리아를 많이 먹고 나와서 사람에게 그 박테리아를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생물도 마찬가지의 위험성은 같이 존재하며, 또한 조리법만 조금 신경 쓰기만 하면 전혀 문제 될게 없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넷째, "상징적" 이론입니다. 동물의 행동 습관이 얼마나 영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를 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새김질하는 동물은 마치 그 모습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히브리어 단어 중 "하가"라는 단어는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새김질 하다"와 "묵상하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어원적으로도 마치 새김질 하는 동물은 율법을 묵상하는 상징성을 띠기 때문에 영적인 동물이므로 정결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또한 양 같은 동물은 목자를 잘 따르기 때문에, 목자되신 주님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성이 있으므로 영적인 동물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지나치게 상징적이라는 점이 있습니다.
이제 네 가지 생물학적 분류를 하나씩 간단히 살펴 봅시다.
1. 땅의 짐승: 정결한 것—“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 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3절). 정결한 육지 짐승의 두 가지 조건은, 동시에 두 가지를 다 충족해야 하는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굽이 갈라졌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거나(7절)에 해당되는 돼지 같은 경우는 먹지 못하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 중에 토끼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은 드물지 몰라도, 돼지고기는 국민음식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이것이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만약 오늘날 여전히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다면, 대한민국에 교회가 지금처럼 신자가 넘쳐나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이제 새김질은 하는데 굽이 갈라지지 않았다면(낙타—4절, 사반—5절, 토끼—6절) 부정한 것이므로 먹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새김질”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로는 “마알라트 게라”인데, 생물학에서 말하는 반추동물—되새김질 하는 동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소같이 위가 4개라서, 위에 들어간 음식물을 다시 입으로 올려서 다시 씹어서 삼키고…하는 것을 반복하는 되새김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새김질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본래 뜻은, “음식물을 철저히 씹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끼 같은 것은 키워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반추동물이 아님에도 풀을 뜯고 계속 잘근잘근 씹어댑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김질”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정결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 없이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지 동물뿐만 아니라, 물고기, 새, 곤충에 관한 규례 또한 다 상관없이 먹을 수 있습니다.
2. 물고기: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9절). 구약시대에는 낙지 복음이나 문어 덮밥 같은 것을 먹으면 죕니다. 세계 3대 요리라고 하는, 상어지느러미 요리도 먹지 못합니다. 상어는 비늘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새: 맹금류는 먹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다른 새를 잡아 먹거나, 육식을 하여 피를 먹는 조류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이점은 이 박쥐(19절)를 새에 넣고 있지만,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박쥐는 조류가 아니라, 포유류입니다. 세상에 유일한 나는 포유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물학적 카테고리를 보여주는 책이 아닙니다. 단지 날개가 있어서 나는 짐승을 그저 새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4. 곤충: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뒤는 것은 너희가 먹을 지”"(21절). 주로 메뚜기 종류들이 이에 속합니다.
이 모든 음식 규정대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일일이 따지지 않고 먹어도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늘날 우리는 구약의 정결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규례와 상관없이 살 수 있게 되었나요? 예수님께서 구약의 음식법을 친히 철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 음식법을 철폐하시는데, 그것은 예배와 관련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따집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대답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사29:13). 이 말씀을 하시고는 이어서,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막7:7)라고 일침을 가하십니다. 계속 이어서 훈계하시길,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막7:13)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음식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막7:15-16, 새번역).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막7:19)라고 마지막 결론을 예수님이 직접 내리십니다. 사실상 구약 음식규례의 철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자들은 아무 음식이나 다 먹어도 상관없는 것입니까? 좀더 정확히 말하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 것이나 먹어도 괜찮습니까? 예를 들면, 제사상에 바쳐진 음식은 먹어도 되는 걸까요? 또는 술은 마셔도 되는 것입니까? 정말 모든 음식물에 대해서 자유하냐?라는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고전10장에서 아주 선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1. 모든 것이 가하다(23절).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구약의 음식법을 철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23절). (Everything is permissible, but not everything is beneficial...). 이 말씀은 이제 음식 "법”은 없어졌지만, "유익과 덕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시장에 나오는 고기 중에 상당수는 이방신에게 제사 드려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 사이에 이것을 사먹어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답을 내립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25절).”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 임이라”(26절).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27절). 여기서 두 번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기술적으로는 1. 먹어도 되며, 2. 또한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지 말아야 할 경우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것은 제사에 올린 음식입니다”하고 여러분에게 말해 주거든, 그렇게 알려 준 사람과 그 양심을 위해서, 먹지 마십시오.”(28절, 새번역). 그리고 이어서 양심을 설명하길, “내가 여기에서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 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29절, 새번역)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불신자의 집에 신자들이 식사 초대를 받아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방신에게 바친 제사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신자가 “이 음식은 제사음식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믿음이 강한 신자도 있지만,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에는 그런 사람들이 자칫 이것으로 인해, 시험에 들거나 실족할 수 있기 때문에 먹지 않아야 된다는 권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28)고 명령하면서 그 양심은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타인의 양심이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자신도 이에 대해 결심하길,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고전8:13, 새번역). 이것을 두고, 고전10장에서 바울은 “유익과 덕”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한국에 성안교회에 있을 때, 저의 목회 멘토이신 윤장운 목사님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유익과 덕”이라는 측면이었습니다. 하루는 오랫동안 천주교 신자였던 부부가 교회에 등록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교역자들을 초대해서,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남자 집사님이 대뜸 자기가 가장 아끼는 거라며, 위스키를 들고 나와서는, 교역자 모두에게 한잔씩 따라주는 것입니다. 그분은 천주교에 오래 있다 보니, 기독교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교역자들은 사색이 되어서 당황스러워하고 있는데, 윤목사님께서 잔을 드시더니 원샷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부교역자들은 얼떨결에 목사님께서 그러시니, 다들 따라서 원샷을 해버렸습니다. 윤 목사님은 이제 개신교에서 신앙생활을 해 보려는 새가족을 위해서, 한국예수교장로교 전통을 깨어 버렸던 것입니다. “유익과 덕”이라는 측면이죠. 제 생각에는 아마 그 자리에 믿음 약한 신자가 같이 끼어져 있었더라면, 목사님은 차근차근 설명하고, 술을 드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모두 믿음 좋은 목사님들만 있었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몇년 전에 이 스토리의 주인공 집사님 내외가 미국을 방문하면서, 제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묻지도 않았는데, 그 집사님이 오래전 이 일을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다시 꺼냈습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 때 참 창피하기도 하고, 정말 고맙기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만약 윤목사님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 술을 거부했거나 그 자리에서 무안하게 했다면, 아마도 그 다음주에 교회를 출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참 지나고 보니, 목사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윤목사님의 그러한 행동은 고전10장에 근거한 행동이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신앙을 지키고, 계속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익과 덕의 원리"입니다.
나는 이런 에피소드를 말씀 드리면, 혹 마음에 “자유”를 얻는 분들이 있을까 봐 좀 걱정이 됩니다. “그래 목사님도 술을 마시는데, 나도 마음대로 술을 마실꺼야…”라고 자신의 양심에 한껏 자유를 부여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서 "유익과 덕의 원리"는 어떤 사람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동일하게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장로교 고신 목사로서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아무리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집에는 누가 그냥 주고 간 와인이 두병이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시지 않습니다. 내가 술이 약해서라거나 체질에 안맞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유익과 덕의 원리"가 보이지 않는 나만의 장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고전10장에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개인의 양심을 넘어서서, 결국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약의 음식법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맘대로 악용하거나, 맘대로 행동하겠습니까?
결국 사도 바울이 “유익과 덕”이라는 측면으로 음식에 대한 권면을 하는 것은, 구약의 음식법은 예수님께서 철폐하셨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사랑의 법”이라는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최종적으로 이 “사랑의 법”을 음식법과 관련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 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14:15).
우리가 이 모든 율법의 문제는 결국 사랑을 따라 행해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를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45절을 보세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의 가진 것과 노력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거룩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거룩의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레위기를 처음부터 계속 읽다보면, 드는 생각은 딱 한가지 입니다. “나는 가망이 없구나” 아무리 양과 소를 가지고 제단에 나와서 피를 뿌리고,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를 드려도 나의 죄의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안 보입니다. 제사를 아무리 정결하게 드려도 계속 나 자신의 죄는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거든요.
이번주간에 우리가 큐티하는 매일성경의 본문이 레위기 아닙니까? 계속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나에게는 소망이 없다”라는 결론이 납니다. 주중에 교우 한분이 제게 카톡을 해서 레위기를 읽다가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제가 드렸더니, 마지막에 이런 답신이 왔습니다. “참으로 저의 죄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것인지 레위기를 대하며 보게 되네요…” 사실 레위기를 읽으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레위기를 제대로 읽은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계속 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나” 자신 스스로에게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레위기에서 최종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가 인간은 죄에 대해서 절망적이고 무능하기 때문에 소망이 없다는 것만을 알려주고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을 보면 정말 절망적이지만 눈을 들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얻은 것이 거룩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매일 매일 실패하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그때마다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서는 우리가 매일 매일 거룩하지 못하므로,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리스도의 거룩에 붙들려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도무지 우리의 능력으로는 안되며,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만이 능력입니다. 그리스도만이 거룩의 길입니다. 매일매일 범죄하고 또 범죄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반복된 나날을 보내지만, 우리의 죄성의 문제는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곧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