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거룩1: 서론(레1:1-4, 막7:9-13, 2016년4월3일 주일)
거룩1: 서론(레1:1-4, 막7:9-13, 2016년4월3일 주일)

    오늘부터 레위기를 세 번에 걸쳐서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위기서는 신자들이 가장 읽기 싫어하는 책 중에 하나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구약성경의 2/3가 이야기 장르로 되어 있는데 반해, 레위기는 스토리텔링 기법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루합니다. 또 읽기 곤란한 이유는 오늘날 나의 삶과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레위기에는 온통 제사법에 대해서 말씀하다보니, 오늘날 신자는 구약의 제사를 드리지 않기 때문에 오는 괴리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레위기는 유대인 자녀들이 회당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책일 정도로 중요한 책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역시 레위기를 알지 못하고서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레위기는 굉장히 중요한 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론 격으로, 오늘은 레위기의 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주제가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레위기 설교는 본문 장르의 특성상, 본문을 한 구절 한 구절 세분화 시켜서 살펴볼 것입니다.

    1절,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고 시작합니다. 1절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레위기서는 2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는 말이 최소한 29번 등장합니다. 반면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는 딱 한번 등장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회막”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the Tent of Meeting(NIV), tabernacle(KJV)이라고 나옵니다. 회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지정한 대표자 한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사실과 지정한 한 장소에서만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그리고 “아무 장소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합니까? 거룩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아무나, 그리고 아무 장소에서나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맨 첫 구절이 갖는 의미는, 하나님의 거룩성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도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부르신 자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께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해야 됩니다. 
    레위기에 나타나는 광야교회의 예배는 세가지 중요한 "거룩"과 관련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1. "거룩한" 하나님께 예배할 때 2. "거룩한" 지정된 장소인 회막을 통해서 예배하며, 3. "거룩한" 지정된 인간 대표자인 대제사장이 예배하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광야교회가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 전, 시나이 반도에 세워집니다. 이 광야교회의 멤버는 대부분 야곱과 요셉의 후손인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교회 속에는 “중다한 잡족”(출12:38)이라고 표현된 이방인들도 일부 끼워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거의 400년간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면서,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광야로 이끌고 나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의 장소를 회막으로 지정하십니다. 그리고 예배의 대표자를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주어서 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광야교회인 구약교회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회막’과 ‘인간 대표자’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면 신약교회는 구약교회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첫째, 회막이 사라졌습니다. 회막이 사라진 이유는 더 이상 회막이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곧 회막을 대신할 성전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도 필요 없게 되어 사라졌습니다. 회막과 성전이 필요 없다는 말은 곧, 회막과 성전에서 드렸던 구약의 피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어버렸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데 제사의 장소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면 중요한 질문을 해 봅시다.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은, 신자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까? NO. 신약교회에 회막과 성전이 없어지고, 구약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신자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또는 거룩성이 약화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신약시대의 신자는 구약시대 때보다 훨씬 더 거룩한 삶을 통해서 드려야 할 “영적 예배”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롬12:1).

    예수님께 신약교회에 예배에 대해서 요한복음 4:21-24에,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느리.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말씀하시면서, 더 이상 신약교회의 예배는 어떤 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제 더이상 광야교회의 회막이나, 이후 구약교회의 성전교회를 통해서 피의 예배를 드려야하는 한 장소에 얽매이는 예배가 드려질 필요가 없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배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다고 예수님이 직접 선포하신 사건입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교회의 신자는 자기의 선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이며,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곧 자신의 "회막"이며 "성전"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삶의 예배" "영적 예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신자들의 예배가 “건물” 중심이 아니라, “삶”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저번 한 주간 풀러턴에 있는 미국교회당 세 군데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제게 약도까지 그려주시면서, 한번 보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보니 한 교회는 미국장로교회이고, 하나는 미국회중교회, 또 하나는 미국성공회교회였습니다. 미국장로교회당은 위치나, 본당구조나, 싸이즈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맘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배하는 오후1시에 인도네시안 교회가 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회중교회는 위치는 좋은데, 장소가 너무 좁아서 우리교인이 다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미국성공회교회당은 위치도 별로이고, 본당 싸이즈도 작을뿐더러, 본당 구조가 네모도 아니고, 부채꼴도 아닌 원형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 장로교 예배형식으로는 도무지 산만해서 드릴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 곳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곧장 제 사무실로 갔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하나님께 새로운 예배 장소가 지금 이 시점에 과연 필요한지, 만약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이런 저런 합당한 이유로 새로운 예배 장소를 물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인도해 주실지…등등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는 책상 위에 올려진 교인의 이름이 쭉 적힌 종이를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 교인명단 종이를 쭉 보니 제가 우리교회 목회 한지 1년 반 정도가 되었는데, 숫자가 거의 두 배로 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기도 중에 제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았습니다. 만약 새로운 예배처소를 찾아야 되는 시기가 지금이라야 한다면 그것은 1. 교인의 숫자가 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2. 교인의 숫자가 더 늘어야 하기 때문인가? 사실 기도 중에 답이 나지 않아서, 일주일 동안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맘속에 중요한 한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질그릇교회의 예배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과연 삶의 영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매일매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예배장소를 더 좋은 위치로 옮겨서 교인이 더 많이 느는 것이 꼭 나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장로교 예배 전통에 맞는 예배당 스타일을 찾는 것도 주일 예배를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더 이상 촛불냄새 안 맡아도 되고, 연기 때문에 예배 중에 신경 안 써도 되는 환경이 주어지면 더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 가운데 계속 일어나는 성령님의 마음은, “건물의 예배가 아닌, 삶의 예배를 드려라”입니다. 그래서 제 맘속에 드는 한가지 확신은, 우리 질그릇교회에 어떤 식으로든 각 개인의 삶에서 예배의 부흥이 일어나고,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열정과 눈물로 기도하면서 진정한 예배자로 예배당에 온다면 그곳이 어디인들 무슨 상관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가장 합당한 때에 더 좋은 장소와 더 좋은 시간대, 더 좋은 예배 건물을 허락하신다면 우리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매일 매일 여러분의 삶이 예배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신약교회가 구약교회와 달라진 점 두 번째는, “인간 대표자”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구약교회에는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해진 장소인 회막 안에서도, 가장 거룩한 곳으로 구별된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한 사람만 만나 주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일반인이 들어갔다가는 바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인간 대표자인 대제사장에게도 치명적인 약점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그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성소 안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점과 2. 그도 늙어서 결국 죽게 되므로 영원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인간 대표자”인 대제사장이 사라지는 대신, “예수께서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6:20).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영원하신 중보자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대제사장이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약점인 죄가 있어서 죽임을 당하거나, 늙어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살아서 우리 신약교회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 하십니다. 

    이제 본문 2절,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무엇을 명령하셨는지에 대해 기록합니다. “예물을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3번이나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 “예물”이라는 단어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 예물은 짐승으로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번제의 예물을 명령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지시하십니다. 1.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2절), 2. 흠 없는 수컷(3절). 생축이라는 것은 집에서 키우는 가축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야생에서 막 사냥을 해서 잡아온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축은 반드시 흠 없는 수컷이어야 만 했습니다. 당시 수컷은 암컷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흠 없는 수컷”이라고 하면 가장 좋은 동물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 중 가장 최상의 것을 갖다 바치라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는 평범한 소 한 마리가 미국 돈으로 치면 약 6,000불 전후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뉴스에 보니까 충북 괴산에서 50,000불짜리 소가 팔렸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흠 없는 최상품의 소와 평범하거나 혹 흠이 있는 소와는 서로 가격만 하더라도 큰 차이가 납니다. 
    광야교회의 예배자는 자신이 기른 최고의 재산 가치를 지닌 것을 예물로 가져와야 했습니다. 사실 여기에서 더 중요한 궁극적인 의미는 “주인이 제대로 값을 치른 제물”이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삼하24장에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라는 범죄를 통해서 이스라엘에 온역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이때 다윗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갓 선지자가 다윗에게 말하길,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이때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그 타작마당을 사서 번제를 드리겠다고 하자, 아라우나는 다윗에게 자신의 소와 번제의 땔감을 무료로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합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24:24). 그러고 나서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서 번제를 드립니다. 그랬을 때 “재앙이 그쳤더라”(삼하24:25)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처럼 번제의 제물은 “주인이 제대로 값을 치른 흠 없는 제물”이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구약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점차 꼼수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말1:8(현대인의 성경), “너희가 눈멀고 병들고 저는 짐승을 나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 악하지 않느냐?” 사람들이 점차 자신의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은 두고 어차피 값도 없고 팔지도 못하는 것을 제물이라고 바쳤다는 것입니다. 말1:14(새번역)은 경고합니다. “자기 짐승 떼 가운데 좋은 수컷이 있어서, 그것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서도, 흠 있는 것으로 바치며 속이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레위기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은 곧 "제대로 값을 치른 제물"이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값을 치르다"라는 단어는 "키페르”( כִ פֶּ ר) 입니다. 이 “키페르”는 "속죄”라는 뜻입니다. 죄 지은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돈으로 대신해서 치르는 행위를 말합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예물”은 인간을 대신해서 형벌을 치르는 동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재산을 갖다 바침으로 “몸값을 지불”하는 것이 되며, 대신 그 동물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제물에게 하는 첫 번째 행동이 있는데, 4절,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찌니라” 여기서 “그”는 예배자를 말합니다. 대제사장이 아닙니다. 속죄를 위해서 실제 바쳐지는 동물의 인간 주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자와 대제사장의 일이 구분되는데, 예배자는 제물을 씻고, 죽이는 궂은 일을 하고, 안수하는 것까지 합니다. 그러고 나서 제단에 피를 뿌리거나 태우는 일은 대제사장이 도맡아서 하게 됩니다. 
    이때 예배자가 궂은 일을 다 끝내고 가장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입니다. 제물의 머리에 예배자가 안수하는 의미는, “동일시”입니다. 예배자 자신과 죽음을 기다리는 제물과 동일시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레위기 16장에 가면, 아사셀 염소에게 두 손으로 안수하여 인간의 죄가 아사셀 염소에게 전가되게 하는 의미가 나옵니다. 그러나 번제에 있어서 안수의 가장 첫 번째 의미는 동일시입니다. 
그래서 이 “안수하다”는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손으로 누르는” 행동을 말합니다. 손을 얹어서 누르면서 몸을 지탱할 정도로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동일시의 원리입니다. 제물이 죽을 때, 사실 나도 같이 죽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동일시의 원리”가 그대로 십자가에서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대신 죽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히는 영적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건이 곧 신자 자신이 못박히는 사건과 동일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2:2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신약교회의 신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동물로 피의 예물을 드리지 않아도, 단번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예물로 바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속죄를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예물”이 되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벧전1:18-19, “너희가…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약교회의 신자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고르반”의 문제입니다. 오늘 신약성경 막7장 본문에 보면, 11절, “…사람이 아비나 어미에게…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여기에 “고르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코르반”이라는 단어를 한글로 번역할 때 “고르반”이라고 쓴 것입니다. 이 코르반은 오늘 레위기 1장 2절, 3절에 3번이나 등장하는 “예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유전, 즉 전통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릴 자신의 제물을 따로 떼어놓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해서 세상적으로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제물에 대해서 “코르반”이라고 지정해 놓고, 실상은 자기가 계속 가지고 있고 성전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로만 “코르반”이라고 하고는 성전에는 갖다 바치지 않는 이중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고르반 서약을 할 경우, 하나님께 자신의 재산의 일부를 바쳤기 때문에, 가난에 허덕이는 부모가 있어도 봉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고르반 서약만 하고서는, 성전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고르반 했기 때문에, 부모를 돈을 들여서 모시지 않아도 자기의 할 몫은 다 했다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부모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고르반 서약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인 5계명을 어기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버젓이 하고도, 그것이 믿음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예수님 시대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빠질 수 있는 신앙을 가장한 위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대판 고르반”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여러 교우들이 가난한 지체들을 위해서 "지정구제헌금"을 종종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지정구제헌금을 해서 구제비를 전해 받은 사람이, 자신을 평소에 알아주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줬는데도 자신을 몰라주거나, 무시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섭섭함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고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자기를 위해서 구제헌금도 하고, 이렇게 도와주고 기도도 해주었는데...이 사람은 왜 나를 이렇게 대접하지?" 구제헌금을 해서 도와줄 때에는 분명히 자원하는 심정으로 했는데, 그것이 섭섭함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것은 사랑을 주긴 주었지만 온전히 준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으로 시작된 온정이 섭섭함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런 섭섭함을 가진 신자는 결국 "고르반!"하고 서약은 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물을 내어놓았지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 "고르반"서약을 하고서는 제 5계명을 어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룩은 예물(코르반)을 드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약교회의 신자의 거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 자신의 정과 욕심을 함께 못박음으로써, 나도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며, 그래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거룩은 내가 무엇을 드리겠다거나 무엇을 하겠다거나 하는 결심이나 행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보혈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으며, 우리를 매일 매일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4/3/2016 9:57: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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