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복음11: 베드로의 부인(눅22:31-34, 54-62, 2016년3월20일)
오늘 본문은 큰 두장면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는 베드로의 부인 예고이고, 또 하나는 실제로 베드로가 부인하는 장면이 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장면을 살펴봅시다. 첫 장면의 첫 구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31절).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살펴봅시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31절). “사탄이 밀 까부르듯” “사탄이 체질하려고”라는 말은 농부들의 용어입니다. 한국 농촌에 수확기의 타작마당에 가보면, ‘키’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로 대나무로 넓다랗게 만들어서, 그 안에 타작한 보리나 쌀을 담고 키질을 합니다. 주로 시골에 제 어릴 때 밤에 자다가 이불에 오줌을 싸면, 엄마들이 이 키를 아이 머리에 씌우고, 이웃 집에 소금 동냥을 시킵니다. 이 키를 아래 위로 흔들면서 타작한 곡식이 공중으로 떠 오르게 합니다. 그러고는 알곡은 키 안으로 다시 떨어지고,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 가버립니다.
사탄이 이 키질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키 안에 곡식을 넣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넣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타깃”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얼마나 쭉정이인지 한번 다 날려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적으로 약골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는 사단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어가서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이제 사단은 자신감이 붙어서, 나머지 11명의 제자들도 시험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단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이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께 청구(ask)하였습니다. 이것을 새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31절). 마치 사단은 오래 전 하나님의 사람 욥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허락을 받던 것과 같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직접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그 사단의 요구를 허락하십니다. 대신 성경은 예수님의 특이한 행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2절,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고 기록합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단어는 ‘너’라는 단수입니다. 31절만 하더라도 사단은 제자들 모두를 시험하겠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라는 복수를 썼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시험이 허락된 가운데 예수님은 특별한 중보기도를 드리는 데, 특별히 베드로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새번역에 보면,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이라고 나옵니다. 저는 예수님이 베드로만을 차별하여 중보기도 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제자들 한명 한명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여기에서 '너'라는 단수를 쓰면서, 베드로를 위해서 중보기도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베드로가 사단의 주공격 대상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적 전투의 중요한 그림이 나옵니다. 시험의 공격은 사단이 하고, 중보기도로 방어하는 분은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시험들어 넘어지도록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약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죄와 관련하여 넘어지는 모든 시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부터 옵니다. 물론 광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시험의 제1차원인은 아니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혹 죄악가운데 있다든지, 시험거리가 찾아와서 영적 방황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할 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중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혹 시험에 들어서 넘어졌다면 가장 빠른 회복의 길은, 주님의 중보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만지셔야 됩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터치하셔야 가장 온전하게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시험 당하여 아파하고 계시다면, 사람의 위로보다 가장 먼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회복시켜 주시도록 기도하고 말씀보고 하셔야 합니다.
이제 주님이 중보기도를 하셨다 말씀했을 때, 베드로의 반응이 나옵니다. 33절,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베드로의 성격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성미가 급하고, 저돌적이며,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래서 호언장담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누가복음에는 이 말씀을 듣고 난 다음, 제자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26장, 막14장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막14:31). 마가는 특히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힘주어”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아마도 조금 자존심이 상해서 음성을 높여서 또박또박 말했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그 당시 맘이 이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정말 저를 어찌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죽으면 죽었지 어떻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러면 정말 창피한 일이죠” 이 말을 베드로가 했을 때, 모든 제자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기록합니다. 사실 베드로만 호언장담한 것이 아니라, 성경은 11명의 제자가 모두 그렇게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사건이 해필이면 베드로에게 닥쳤을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에 대해서 예고하시고, 곧장 겟세마네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기도가 마쳐갈 무렵, 대제사장과 그 일당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혀 갑니다. 이때 제자들의 행동을 성경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막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다고 호언장담하던 11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자 줄행랑을 쳤습니다. 마가는 심지어 얼마나 급했던지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려고 할 때, 덮고 있던 홑이불을 던져버리고 알몸으로 도망쳤다(He fled naked)고 막14:52에 기록합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하던 그 기백은 온데간데 없고, 잡힐까 봐 옷까지 벗어놓고 도망칠 정도였으니 마치 코미디 같은 장면이 연출된 것 같습니다. 호언장담의 고백을 한지 며칠 또는 한 달이라도 지났다면, ‘변심’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과 몇 시간 전의 고백과는 완전히 반대의 행동을 하는 제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들이 거짓 고백을 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잡혀가서 죽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주님과 같이 감옥에도 가고, 죽는 자리까지 가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멋있게 보이기 때문에 그랬던 걸까요?
나는 베드로와 다른 모든 제자들이 그렇게 행동한 것은, “자기 확신”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자기 확신’이 뭘까요?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특별의식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특히 베드로는 자기확신—특별의식이 아주 강했습니다. 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모두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내면에는 어떤 의식이 있습니까? “다른 모든 사람과 나는 다른 사람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분리해서 차별화 시키는 것이죠. 이것을 일컬어서 성경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뭘까요?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기능이 떨어집니다. 남들은 자기를 평범하게 보는데, 자신은 정말 똑똑하고 근사한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이런 것은 자존감이 높은 것이 아니라,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 인식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대신 자신을 포장하는데 능수능란합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면서 교묘하게 안 그런 측 합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다른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별로 나은 것도 없으면서 나는 영적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며 삽니다.
교만하면서 자기확신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아주 교묘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위장하기에 달인의 경지에 올라 있습니다. 자신은 어떤 순간에도 시험을 당하지 않을 것처럼 행세합니다. 자신은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위장하는 데 능숙합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하염없이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경건하지 못하면서, 남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온갖 영적 무장을 갖춘 용맹한 군사처럼 해동합니다. 자신은 늘 평온하고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실상은 성령충만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가장 온유한 것 같이 행동하면서 실상 마음속에는 칼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편적으로 다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막10장에 보면, 어느 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그럽니다. “예수님, 나중에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날에, 우리를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이 말을 했을 때 나머지 열명의 제자들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막10:41). 나머지 제자들이 이 소리를 듣고 화를 냈다는 것은 무슨 심리가 반영된 것일까요? 주님의 우의정, 좌의정 자리는 다름 아닌 “내”가 앉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차별화하고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아주 위험한 적은 “자기 확신””자기 열심””자기 결단”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나는 믿습니다”에 있지 않습니다. I believe in Jesus.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잘 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마치 내가 믿고 싶어서, 나의 의지와 확신을 가지고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신앙고백이 “내”가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살전1:5,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 임이라…” 기독교 믿음의 출발은 “나”가 아니라, “성령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성령님이 신앙고백의 주체가 되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한 사람을 구원시키려고 할 때,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이 생기는 첫번째 반응은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해야 맞습니다. 만약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 수영장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수영을 전혀 못합니다. 나는 완전히 깡통입니다."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만약 "나는 수영을 할 줄 압니다"라고 먼저 말해버리면, 옆에서 누가 밀어버리면 그냥 물에 빠져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정말 물에는 완전히 쑥맥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자신을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 수영을 배우고, 실제로 수영을 할 줄 알면 그제서야 "나는 수영을 할 줄 압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믿음에 대해서 체험도 한적 없고, 알지도 못하고, 자신에 대한 정확한 영적인 인식도 없으면서, 무조건 "나는 믿습니다"라고 해 버리면 그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지려고 할 때, "나는 완전히 깡통입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먼저 오고, 그 다음 주님을 만난 체험으로 그제서야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에 대해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죄책감을 부추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잘 못 이해하는 분들은 대게 회개를 무슨 죄책감에 못 이겨서 입으로 뱉어내는 비밀자백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은 “죄책감”(feeling guilty) 같은 것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도무지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내 속에는 그 어떤 조그만 의도 없습니다”라는 자기 인식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줄 곧 외쳤던 것이 뭡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와 천국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회개 없이 천국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천국백성이라면 그 사람은 반드시 회개를 거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회개는 “내 속에는 어떤 선이나 의도 티끌만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 인식입니다. 이런 인식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 의존도”는 낮아지고, 점점 “주님 의존도”는 높아집니다. 내 속에 어떤 선이나 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모두 주를 버릴 찌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이렇게 고백해야겠지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저를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저는 주님을 버릴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놓치시면 저는 주님을 매일 매일 부인할 것 같습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3년 반 전에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을 때, 그가 타던 배에서 예수님께 무릎 꿇고 했던 고백이 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이게 어쩌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했을 동안에 가장 순수했던 모습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차차 그의 순수했던 자기 인식이 둔해지고, 굳어져 갔습니다. 그러면서 근거 없는 육신적 자신감에 가득 찼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가 가장 순수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의 년 수가 더 해지면서 때가 낍니다. 순수성을 잃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던 것이 점점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나는 믿습니다”만 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장 볼품없는 종교로 전락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은, “나는 믿습니다”는 있는데 “나는 죄인입니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이제 두 번째 장면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살펴봅시다. 54절,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요한복음에 보면 이 대제사장의 집은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요18:13)고 알려줍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다른 성경에는 없는 내용들이 상세히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대제사장의 집의 뜰까지 들어갈 수 있었느냐는 의문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마침 제자 중 한 명이 대제사장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그 제자는 분명히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기록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자기 책에 잘 넣지 않고, 대게 3인칭 또는 제3자 형식으로 쓰는 버릇이 있습니다. 요한도 자기가 쓴 요한복음에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요18:15)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요한이 먼저 안나스의 집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요18:16). 그러고는 요한이 문 지키는 여종에게 부탁해서, 바깥에 서 있는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와 달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대제사장 안나스의 저택 뜰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경은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고 했습니다. 아마 모닥불을 화덕에 지피고, 옹기종기 둘러 서서 손을 불에 녹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서서 불을 쬐지 않고, 앉아서 있었다고 기록합니다(마26:54). 아마도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들어오라고 했던 그 문 지키던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는 “이 사람도 그와 예수와 함께 있었소”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즉시 응대합니다.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두 번째 그럽니다. “너도 그 당이라”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니요” 또 시간이 흐르고 난 후 한 사람이 그럽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그럽니다.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하는 순간 닭이 울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62절에, 베드로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라고 기록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부인 예고”를 하시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까지 슬피 울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정말 비통할 정도로 울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그 말씀이 스쳐 지나가면서 더 그 슬픔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61절에 보면,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통곡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의 내용이 생각나서였을 것입니다. 32절,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혹 넘어질 지라도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도록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그 말씀이 얼마나 베드로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로부터 배신도 당하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도 당하시는 판국에 오히려 그런 제자를 위해서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었다고 하니, 상대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쓸모 없이 느껴졌을까요? 그러면서 드는 감정은 뭘까요? 나 같이 이렇게 쓸모 없고 말뿐이며 최소한의 신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믿음이 꺾이지 않기를 염려해 주신다는 생각에 더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처음으로 정확히 들여다 보는 순간 그가 깨달은 것은, “내 속에는 아무런 선이나 의도 없고, 주님은 선 그 자체시구나”일 것입니다. 실질적인 “자기부인”이 처음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사람이 어떨 때 자기부인이 일어납니까? 그 동안 간과해 왔던 어떤 사실이, 자신의 실패를 통해서 훨씬 부각되어서 회상 되어질 때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뚝뚝하신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생각하길 나는 커서 아빠가 되면 정말 다정다감한 아빠가 되어야지 라고 생각 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와서는 아이들과 관련하여 힘들어 했던 것이, 아이들 학교 라이드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오후에 큰 아이를 학교에 태우러 갔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질 않습니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고, 한참을 기다려서 한 20분이 지나서야 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여러 가지 일로 몸도 맘도 너무 지쳐있을 때라 그게 민감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차에 타자마자, 막 화를 냈습니다. “아빠도 너 때문에 너무 힘들다. 아빠 좀 도와 주면 안되겠니?” 그렇게 하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날 밤에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옛날 제 아버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 거제도에 딸린 가조도라는 낙도에서 자랐습니다. 중학교를 읍내로 다녔는데, 배를 타고,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매일 오후에 학교를 마치고 나면, 아버지께서 배를 몰고 나를 태우러 나오셨습니다. 어떤 날은 일을 한참 하시다가 나를 위해서 일부러 나오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한참을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시기도 하고 했는데….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나에게 “너 태우러 나오는 게 힘들다”라는 말씀을 한번도 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 생각이 나면서 기도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날 저의 맘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마음이었습니다. “아, 나는 아버지보다 더 좋은 아빠가 돼야지!”라고 호언장담 했던 것이 얼마나 부족한 생각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 나는 내속에 아무런 의도 없구나”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실패를 통하여 나는 제대로 된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는 숱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상의 실패”를 통해서 내 자신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내 안에는 괜찮은 구석이 티끌만큼도 없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점점 더 내 안에 생기게 되는 마음은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베드로가 “심히 통곡”하던 그 시간에는 “자기 부인”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예수님을 부인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믿음을 염려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인해 도리어 그것이 “자기 부인”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건 때문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한 단어를 상기시켜야만 합니다. 헬라어ἀπαρνέομαι(아파르네오마이) 입니다. “부인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딱 두 번 사용하십니다. 한번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ἀπαρνησάσθω)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막8:34, 눅9:23)와 오늘 본문에서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ἀπαρνήσῃ)”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을 통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부인이 일어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실패가 믿음이 꺾여서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초라한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가 도리어 자기를 부인하는 계기가 되어, 또 다른 사람을 더 굳건히 세우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32절 말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다른 믿음의 형제들을 굳게 세울 수 있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부인”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단이 제자들을 시험하려고 할 때, 기도했습니다. 오히려 이 시험이 도리어 “자기 부인”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게 해 달라고 중보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제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가 되고, 이후에 신자들에게 편지를 쓸 때 계속 강조하는 것이 “믿음을 굳건히 하라”( στηρίζω)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보세요. 1장부터 강조합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6절). 그러면서 편지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그리스도께서 잠간 고난을 받는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하시며(στηρίζω)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벧전5:8-12). 베드로가 가장 애용하는 단어를 보면, “굳게, 온전케, 강하게, 견고케”하다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셨던 “네 형제를 굳게하라(στηρίζω)”라고 명령하셨을 때 사용하신 단어가 바로, στηρίζω (스테리조)라고 하는 단어인데, 베드로가 자신의 서신서에서 가장 즐겨쓰는 단어가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가 평생 잊지 못할 자기 부인이 일어났던 그때 그 사건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명령인 “네 형제를 굳게하라”라고 하신 말씀대로 정확하게 그 단어를 사용하면서, 신자들의 믿음을 “굳게” 세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