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10월 10일-시 23, 사 24:17-23, 막 2:18-22 [주말묵상] 그림자 아래 차려진 잔칫상
시 23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 24:17-23
17  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  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1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22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23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막 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그림자 아래 차려진 잔칫상

장례식장 식당에서 오랜만에 만난 사촌의 농담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나면, 우리는 얼른 주위를 둘러봅니다. 이 자리에서 웃어도 되는 걸까. 반대로 손주의 돌잔치에서 사진을 찍다가 먼저 떠난 이의 얼굴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지면, 서둘러 고개를 돌립니다. 기쁜 날에 울어도 되는 걸까.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마음과 자리가 어긋난 채로 삽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신앙인으로서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옳은지 묻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던 사람들의 물음도 이와 닮아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막 2:18).

그들의 물음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금식은 세상이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고 온몸으로 고백하는 경건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그려 보인 땅이 바로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사 24:18). 피할 곳 없는 땅,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는"(20절) 땅 위에서 금식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실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은 이 시대의 무게를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진지했습니다. 다만 그 진지함은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었습니다. 어떤 때에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지는 정해진 법도가 알려 준다는 전제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바로 그 전제를 조용히 바꾸어 놓습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막 2:19). 주님은 금식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묻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지금 누가 함께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얼굴을 정하는 기준이 달력이나 규칙이 아니라 한 분의 임재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대답이 생각보다 따뜻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올바른 감정을 느끼고 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2절). 마땅한 감정의 목록으로 신앙을 재던 낡은 부대로는, 신랑과 함께 사는 이 새로운 삶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20절). 주님은 눈물을 금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눈물의 날이 오리라고 미리 이름 붙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눈물의 자리에 놓인 것은 다른 누구의 상실이 아니라 신랑 자신의 상실입니다. 잔치의 주인이 스스로 빼앗기는 길로 들어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대답이 따뜻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의 눈물은 주님의 잔치 바깥으로 밀려난 감정이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들어가실 슬픔이고, 주님이 이미 아시는 슬픔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골짜기 한가운데서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 골짜기에서 울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는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원수가 아직 보고 있는 그 자리에 잔이 넘칩니다. 그러니 무거운 마음 가운데 터지는 웃음도 현실을 외면한 경솔함이 아닙니다. 골짜기 한가운데 상을 차리시는 목자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웃어도 되고 울어도 되는 까닭은, 그 어느 쪽도 우리 삶의 마지막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본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을 다스리던 해와 달조차 고개를 숙입니다.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사 24:23). 우리의 밝은 날도, 우리의 어두운 밤도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마지막에 다스리시는 분은 왕이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왕이 지금 신랑으로, 목자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여러분, 그러니 무거운 마음으로 웃게 될 때 너무 서둘러 자신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기쁜 날 눈물이 날 때 그 눈물을 급히 감추지 마십시오. 우리는 교회에 올 때 기쁜 얼굴만 챙겨 와야 할 것처럼 느끼고, 슬픈 날에는 감사를 말하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한쪽 얼굴을 고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신앙은 감정을 정답대로 맞추는 기술이 아니라, 웃을 때에도 울 때에도 신랑 곁을 떠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의 웃음과 눈물이 모두 주님 앞에서 정직해질 때, 그 둘을 함께 담는 새 부대가 우리 안에 빚어집니다.

이번 한 주, 여러분의 식탁에 웃음이 놓이든 그림자가 드리우든, 그 자리에 함께 앉아 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시인의 고백처럼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시 23:6), 웃는 날에도 우는 날에도 그 선하심이 우리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림자 아래 차려진 주님의 상에서 넘치는 잔을 받아 드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나의 목자 되시는 주님,
무거운 마음 가운데 웃음이 날 때도,
기쁜 날 눈물이 흐를 때도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게 하소서.
올바른 얼굴을 고르느라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게 하시고,
웃을 때에도 울 때에도
신랑 되신 주님과 함께 있게 하옵소서.
빼앗길 날을 아시고도 우리 곁에 앉으신 그 사랑으로
저희를 새 부대로 빚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0/10/2026 7:55: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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