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복음10:므나 비유(눅19:11-27, 2016년3월6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거의 끝나가는 시점입니다. 장소는 예루살렘 동북쪽 18마일 지점에 있는 여리고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길어야 2-3일 내에 예루살렘에 당도하고 입성하게 되면, 이제 생애 마지막 주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1절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라고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으며, 그것도 하루 이틀 거리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와 계시다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관심사항이었습니다. 그 관심의 이유를 설명하길 11절 하반절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여기서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입장 차이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목적은, 자신이 “죽어서” 왕이 되시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통하여 “살아서” 왕이 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화려한 왕의 대관식을 통하여, 진정한 이스라엘을 재건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꿈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장안의 가장 큰 이슈로 부상하는 이유는, 시기적으로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 200만명, 즉 예루살렘 인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는 리더는 당연히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소위 므나 비유입니다. 비유의 스토리 라인은 이렇게됩니다. 어떤 귀족출신의 사람이 왕위를 받아 오려고 먼 나라로 떠나려고 합니다. 이때 종 열명을 불러서 각각 은화 한 므나씩을 나눠 주면서 명령하길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하라고 그럽니다. 은화 한 므나는 당시 노동자가 100일 정도를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돈으로 한 만 불 정도 되는 돈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 귀족을 싫어해서, 사절을 뒤따라 보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는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소원과는 상관없이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서 돌아옵니다. 그러고는 종들을 다 불러서 모습니다. 첫째 사람이 주인에게 보고합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주인이 그럽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차지하라” 두 번째 사람이 와서 보고합니다.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남겼습니다” 주인이 그럽니다.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다음 사람이 보고합니다.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당신이 엄한 사람이라 내가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당신은 두지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입니다” 주인이 그럽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라도 했으면 원금에 이자라도 받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그러고는 주인은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고 명령합니다. 이때그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그는 열 므나를 이미 가지고 있는데요?” 이때 주인이 대답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마지막으로 내가 왕위를 받으러 갔을 때, 내가 왕됨을 원하지 않던 원수들을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비유는 끝이 납니다.
우리는 이 비유 스토리를 듣고, 가장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11절에서는 비유를 말씀하는 이유를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비유의 내용과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당장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무슨 연관성이 있습니까?
이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큰 두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째,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예수님의 재림 때가 되어서야 된다라는 말입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가 오려면 멀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그것도 언제일지 모르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 왜 예수님은 마12:2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까?라는 질문을 또 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하셨다가, 오늘 비유에서는 아직 멀었다고 그랬다가 도대체 어떤 말씀이 맞을까요? 답은 “두 개다 맞다” 입니다.
이것을 영어로 하면,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말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지만, 여전히 아직 멀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새관점과 옛관점을 동시에 말씀합니다.여러분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라는 질문에 여러분은 새관점으로는 의인입니다. 그러나 옛관점으로는 죄인입니다. 이금주 집사님은 이성노 집사님을 만나면서 이씨 성을 받았습니다. 새관점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옛관점으로 보면 황금주입니다. 지금도 한국에 가면 이금주라고 하지 않고, 모두 황금주라고 부릅니다. 새관점이 생겼다고 해서, 옛관점이 사라지거나 틀린 관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여러분은 의인입니다.그렇다고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습니까? 사흘이 멀다 하고 죄를 짓습니다. 여전히 여러분 안에는 죄의 습성이 여러분을 괴롭힙니다. 이것을 죄의 잔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법으로는 이미 의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상태는 아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죄인입니다. 여러분의 죄인의 상태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재림 때가되어서야 도래”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예,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완성된 나라는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함이 존재합니다. 여전히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교회를 보면,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부족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척했던 1세기 초대교회에는 영지주의 같은 이단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런데 내용만 조금씩 다를 뿐 교회 역사 2000년 동안 단 한 순간도 교회 안에 이단이 사라졌던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세웠던 교회 안에는 항상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0년 동안 교회 안에 분쟁이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써서, 교회 안에 형제들끼리는 세상 법정에 소송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바울이 목회했던 교회 안에는 심지어 동성애자들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전6:9에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못박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선한 곳입니까? 라는 질문에 나는 absolutely, yes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천사들만 모인 곳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어떤 단체보다 선한 곳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 어떤 단체보다 더 나을 것도없습니다. Already, but not yet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 조심해야 할 양극단이 존재합니다. 첫째, “무사안일 낙관론적 관점”입니다. 이것은 교회는 항상 밝은면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고, 서로 용납하고,이해해주고 감싸 주고, 천사처럼 아름다운 마음씨로 모든 것을 대해 줄 것이니 괜찮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생각으로 교회에 오면 상처 받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항상 그렇지만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조하는 회의론적 관점”입니다. 이것은 교회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교회에는 다 죄인이 모였기 때문에, 원래 그런거야라고 치부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자조적으로 받아들여 버리고, 더 이상의 발전은 없습니다. 우리는 두 양극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전도사시절부터 지금까지 19년째 교회 사역을 하면서 느낀 점은 교회가 어쩌면 세상보다 훨씬 부족하고 못난 점이 많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어떤 면에서 법질서가 무너 진지 오래입니다. 교회도 법이 있습니다.가장 권위있는 법은 하나님의 법인 성경입니다. 그리고 지상교회가 만든 교단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여러분을 교단법으로 일일이 간섭하고 정죄한다고 합시다. 그러면여러분은 단 한 분도 그 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장로교헌법, 예배지침 제3장 제7조 2항에 이렇게 명시합니다. “예배시간에는 모든 사람이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목사가 봉독하는 성경 이외의 다른 서적을 보거나 귓속말이나, 곁눈질이나, 인사나, 졸거나, 웃거나 등의 일체 불필요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헌법적규칙 제9장 제1조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권징은 학습 이상의 교인과 직원의 범죄(폭언, 공회모욕, 폭행, 명예훼손, 불온유인물, 기물파괴, 예배방해 등 포함)와 치리회가 재판하여 유죄할때에 시벌하는 행위이다.”
여기에 보면, “예배방해”죄라는 항목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유죄판결을 해서 벌을 줄 수 있다고 법이 명시합니다. 저는 거의 매주 예배시간에 눈을 10초 이상 감고 계신 분들을 봅니다. 그러면 한국장로교헌법 예배지침 제3장 7조2항에 의거하여, 그분을 유죄판결하여 시벌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시벌 종류의 6가지 중에 가장 낮은 단계인, “권계”라는 것을 줄 수 있습니다. 권계는 “교회의 건덕상 주의를 촉구하고 충고하는 것이다”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제가 오늘 예배시간에 잠시 존 분에게, 예배 마치고, “000집사님, 앞으로 예배방해죄를 짓지 마시고, 주의 하십시오. 경고합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 들일까요?
나는 교회가 세상 단체보다 선할 수 있다는 것이, 교회법이 세상 법보다 우위라거나, 아니면 교회내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도덕수준과 양심을 이미 소유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봐서 도대체 어디가 더 나은점이 있어서,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교회 헌법에 하나하나 따져보면 우리는 교회의 회원이 될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헛점 투성이이고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법인 성경에 비추어서 자격이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성경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삼상12:23)가 있다고 명시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기도를 쉬지 않고, 빠트리지 않고 하십니까? 우리 중에 누구 하나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서, 하나님 나라의 교회의 회원이 될 자격이 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죄인 아닙니까? 성경을 보세요.시1:5, “…sinners will not stand in the assembly of the righteous”(…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저와 여러분 중누구 하나라도 “의인들의 모임”인 교회에 회원권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성경은 죄인은 분명히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이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고, 그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는 의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교회의 은혜이자 복입니다. 조금도 선함이 없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선하게 바꾸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실 그날에 완전히 점도 흠도 없이 순결한 영적 공동체로 세우게 되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형제로 인해서 낙심할 일도 없을 것이고, 지체로 인해서 고통 받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점차 온전한 날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고, 결국 완전한 선에 이르게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신자는 자기의 가진 것으로 부지런히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인이 먼 나라에 왕위를 가지러 갑니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주인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고, 열명의 종들은 교회의 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실 날까지 신자들은 부지런히 헌신하고 섬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열명의 종들이 각각 은화 한 므나씩을 받습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똑같이 받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므나 비유와 비슷한 비유가 하나 더 나옵니다.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와 므나 비유의 가장 큰 차이는, 주인이 주고 간 돈의 액수가 같으냐, 다르냐의 차이입니다. 달란트 비유에는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씩 차별하여 줍니다. 그런데 므나 비유에서는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한 므나씩 똑같이 주고 갑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왜 비슷한 비유를 차별하여 다르게 두번씩이나 말씀하셨을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제가 얻은 답은 간단합니다. 신자가 이 비유의 말씀을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신자들 중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이나 은사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적게 받았으니 적게 헌신하거나 적게 섬겨도 된다 라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므나 비유는 그런 생각마저도 원천 봉쇄합니다. 성경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이 받은 은혜가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이라는 목사님은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진 므나 중 하나는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라고 했습니다. 하루 24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30시간을 받거나, 어떤 사람은 10시간 만 받거나 하지않고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평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기본적으로 부여 받은 하루의 시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서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엡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Redeeming the time, because the days are evil).
그런데 오늘 본문의 므나 비유가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하는 것이 공평성일까요? 모든 신자가 다 똑같이 받았으니 불평하지 말라는 말일까요? 이 비유에서 진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공평성이 아니라 신실성입니다. 악한 종은 자신의 므나를 수건에 싸놓고 보관하고만 있었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주인은 처음 떠날 때 므나를 주면서 “장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악한 종은 주인의 명령을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들었어도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신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고 오해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무조건 남는 장사를 해야 기뻐하시는 구나. 절대 본전치기나 손해 보면안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여 자기의 삶에 적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20대 중반까지 교회학교 교사를 했습니다. 제가 처음 교사가 되던 해에, 2명의 아이를 년 초에 받았습니다. 나에게는 2명을 두 달란트로 생각하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2명을 더 늘려서 두 달란트로 남겨야 된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처음교사가 되고 나니 경험도 부족하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6개월 이상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섬겼지만, 여전히 2명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그런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이거 하나님께 책망 받는 것 아닌가? 달란트를 맡겨 주셨는데, 남기지도 못하고, 므나를 맡겨 주셨는데 남기지도 못하고….라는 부담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신학공부를 하다 보니,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와 눅19장의 므나 비유에서 게으르고 악한 종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이윤을 남기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므나 비유에서 악한 종은 수건에 싸 두었습니다. 그들이 돈을 남기지 못해서 야단을 맞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장사를 하라고 했는데, 장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단을 맞은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한 므나를 받아서 열심히 장사를 했는데도, 사업에 실패해서 한 므나를 잃어버렸다면 주인이 그를 악한 종이라고 책망했을까? 저는 개인적으로 아니라고 봅니다. 므나 비유의 핵심은 뭔가를 남기지 못하는 종은 나쁜 종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말에 순종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있습니다.신실성이죠.
저는 우리교회 진 리더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을 섬기다가 최선을 다해서 섬겼는데도 그 진이 실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진 멤버를 붙들고 눈물로 기도하고, 지체들을 돌아보고 늘 사랑으로 섬겼는데도,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 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진 리더에게 책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리더가 되어서 기도도 하지 않고, 지체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진심으로 생각해 보지 않는 리더는 비록 그 진이 숫적으로 불어나고 외형적으로 잘 되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을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 받는 곳이 아닙니다. 많은 부분 눈으로 당장 보이지 않는 것으로 주님이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진심으로 눈물로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는지, 정말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살아가려고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해서 애썼는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물질적 환경을 통해서 최선을 다해서 섬겼는지, 어쩌면 눈으로 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주님은 마지막 날에 셈하고 따져 보실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실패한 것 처럼 보이고, 뭔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것 처럼 보이는 것으로 가슴 아파 하지 마세요. 정말 가슴 아파해야하는 것은 여러분이 지체를 위해서 무릎 꿇고 눈물 흘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파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이 교회에 외형적인 공을 세우고, 헌신을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말 신실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정말 최선을다해서 섬기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12제자를 부르셨는데, 그 중 한 명은 스승을 배반하고 원수의 손에 팔아 넘깁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살해서 죽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대부분의 제자들은 도망쳤습니다. 수제자라고 자처하던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두고 예수님이 제자도를 가르치는 것에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간으로 오신 이 땅에서의 공생애 기간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최선을 다해서 제자를 세우는 일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와 자신이 책임져야 할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막1:35). 또한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을 정도로 바삐 사역하셨습니다 (막3:20). 그럼에도 잠시 겉으로 제자를 세우는 일이 실패한 것 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하여 책망치 않으십니다. 왜요?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서 사역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세요. 그는 에베소 교회 교인들과 만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 (행20:19)” 또한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 (행20:31).”고 고백합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눈물로 에베소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사도 요한은 에베소교회를 책망하는 편지를 씁니다.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계2:4)” 에베소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이 그렇게 헌신하여 목회했지만, 결국 에베소교회에도 실패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도 바울을 악한 종이라고평가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는 자신의 자원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기때문입니다.
진짜 실패는 지체를 위해서 눈물 흘려보지도 않았는데, 외형적으로 평안한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셨는데 그것을 수건에 싸놓고 땅에 파묻어놓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건강으로 주님의나라를 위해서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섬기라고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직장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일함으로 주님께 영광 돌림으로 그 직장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가정을 여러분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서 가정을 성경적으로 섬겨서, 그 가정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는 최선을 다해서 진을 눈물로 섬기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직분을 맡겼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서 직분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곧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