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19:33-40
33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34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35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36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37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38 주를 경외하게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39 내가 두려워하는 비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들은 선하심이니이다
40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겔 33: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말하여 이르라 가령 내가 칼을 한 땅에 임하게 한다 하자 그 땅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의 하나를 택하여 파수꾼을 삼은
3 그 사람이 그 땅에 칼이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되
4 그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도 정신차리지 아니하므로 그 임하는 칼에 제거함을 당하면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5 그가 경고를 받았던들 자기 생명을 보전하였을 것이나 나팔 소리를 듣고도 경고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6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
마 23:29-36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무덤 앞의 정성, 사람 앞의 침묵
가상의 인물의 경험을 생각해 봅니다. 핸드폰이 아침마다 띄워주는 알림이 있습니다. "3년 전 오늘." 화면을 열어보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입니다.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그 사진을 다시 공유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짧은 문장 아래로 댓글이 달리고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 화면을 내려놓고 나서, 그는 몇 달째 답하지 않은 동생의 메시지창은 열어보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은 진심이었습니다. 다만 그 진심이, 지금 살아 있는 동생에게까지는 아직 가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탄식하신 지점도 바로 여기였습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마 23:29) 말합니다.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30절)고. 그러나 예수님은 곧바로 그 말의 허구를 드러내십니다.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31절).
이 말씀이 뼈아픈 이유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조상과 다르다고 믿었습니다. 무덤을 꾸미는 그 정성이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정성이 과거를 향해서만 흐르고, 지금 자기 눈앞에 서 계신 분에게는 흐르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32절)고 하십니다. 지나간 이를 추모하는 마음과, 지금 살아 있는 진리 앞에서 등을 돌리는 태도는 결코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자연스럽게 붙어 다니는 한 쌍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의 파수꾼 비유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비춥니다. 파수꾼의 자격은 성벽 위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칼이 임하는 것을 보았을 때 실제로 나팔을 부느냐에 있습니다.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겔 33:6). 흥미로운 것은, 파수꾼이 자리를 이탈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여전히 성벽 위에 서 있습니다. 다만 위험을 보고도 소리를 내지 않았을 뿐입니다. 서기관들도 성전 곁에, 회당 안에, 늘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자리는 지켰지만, 지금 이 순간 울려야 할 진짜 소리는 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요. 시편 기자는 그 답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율법을 몰라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시 119:33)라고 구하는 그는 이미 상당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정말 구하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36절). 안다는 것과 마음이 향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서기관들도 율법을 알았고, 파수꾼도 위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실제로 그쪽을 향해 돌아서지 않으면, 아는 것도 보는 것도 결국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저마다 정성껏 공유하고 저장해 온 추억의 사진첩이 있을 것입니다. 지나간 사람, 지나간 시절, 이미 끝나서 안전하게 그리워할 수 있는 이야기들. 그것들을 꺼내 보이는 일에는 우리도 제법 정성스럽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늘, 지금 이 순간 울려야 할 나팔은 어디 있습니까. 화해해야 할 사람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일, 불편해도 진실을 말해야 할 자리에서 입을 여는 일, 오래 미뤄둔 전화 한 통을 거는 일. 그런 일들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리는 지키면서도 나팔을 손에 쥔 채 침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편 기자의 기도는 그래서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안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마음이 실제로 돌아서기를 구하는 기도.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37절)라는 이 짧은 간구가, 사진첩을 향하던 손을 지금 살아 있는 사람에게로, 침묵하던 나팔을 실제 소리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번 한 주, 우리 각자의 마음이 정말 향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다시 물으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저희에게도 정성껏 꺼내 보는 지나간 추억들이 있습니다. 안전하게 그리워할 수 있는 것들 뒤에 숨어, 정작 오늘 살아 있는 사람과 오늘의 진실 앞에서는 침묵해온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마음이 진짜로 주를 향해 돌아서게 하시고, 위험을 보고도 나팔 불기를 주저하는 저희의 손에 다시 용기를 주옵소서. 오늘 저희 눈을 허탄한 것에서 돌이켜 주의 길에서 살아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