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86:11-17
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12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13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14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15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16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1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사 44:18-20
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19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 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20 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
마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같은 나무, 다른 열매
어떤 사람이 나무 한 그루를 벱니다. 그 절반은 불에 태워 몸을 녹이고, 그 위에 떡을 굽고 고기를 구워 배를 채웁니다. 그런데 나머지 절반 앞에서는 무릎을 꿇습니다. 이사야는 이 장면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 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사 44:19). 같은 나무입니다. 같은 손으로 자르고, 같은 불로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한쪽은 밥상이 되고, 한쪽은 신이 됩니다. 이 사람은 이 모순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이사야는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줍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사 44:18).
같은 나무에서 다른 결과가 나오는 장면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등장합니다. 다만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나무 자체의 본질을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이사야의 나무는 사람의 손이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밥상도 되고 우상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무는 다릅니다. 겉모습이나 사람의 조작이 아니라, 그 나무의 본성 자체가 열매를 결정합니다.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거짓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라는 말씀 앞에서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뿌리일까요? 시편 기자는 그 답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나뉘지 않은 마음, 곧 '일심'입니다. 이사야의 우상 숭배자는 나무를 반으로 나누어 하나는 실용으로, 하나는 신앙으로 삼았습니다. 마음이 나뉘어 있으니 눈도 가려진 것입니다. 반면 시편 기자가 구하는 것은 나뉘지 않은 하나의 마음,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전심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나뉘지 않은 마음이라야 참된 것을 분별하고 참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이 '일심'을 자신의 결단만으로 이루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어 간구합니다.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86:15-16). 우리의 나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힘은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가 우리를 만질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우상 숭배자가 스스로의 지혜와 손기술을 신뢰하다가 눈이 가려진 것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참된 분별과 참된 열매는 자기 확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대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떤 나무입니까?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말과 행동으로 우리 자신을 포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이사야의 사람처럼, 삶의 어떤 영역은 철저히 실용으로, 어떤 영역은 신앙으로 나누어 살면서도 그 모순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우리가 얼마나 마음을 다해 애썼느냐가 아니라, 우리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 한 분께 나뉘지 않고 모아져 있느냐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니 이번 주, 스스로 애써 열매를 맺으려 하기보다 먼저 기도하십시오. 시편 기자처럼 구하십시오.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시 86:16), 나뉜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시기를. 우리 눈이 가려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주님께 매달리십시오. 그 전심의 자리에서 맺히는 열매만이 참된 열매입니다.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이번 한 주를 살아내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우리의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어두워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어느 한 부분은 우리 뜻대로, 어느 한 부분은 주님 뜻대로 나누어 살면서도 그 모순을 느끼지 못했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의 결단과 노력으로는 나뉜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와 은혜로 우리를 만져 주시고,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옵소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 우리의 삶이 주님을 향한 전심에서 흘러나오는 참된 열매로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