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사람복음9: 과부와 세리의 기도(눅18:1-14, 2016년2월28일 주일)

사람복음9: 과부와 세리의 기도(18:1-14, 2016228일 주일)

 

    오늘 본문을 보면 기도에 관한 비유 두 개가 나옵니다. 비유는 예수님이 어떤 교훈을 효과적으로 전하시기 위한 스토리텔링 기법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서 가르치시는 이유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그리고 그것을 듣는 청중들로부터 빠른 반응을 촉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비유 본문을 대할 때에는 이 비유의 낱말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깊이 고민하면 해석이 복잡해집니다. 그러므로 그냥 단순히 받아들이시고, 이것에 나는 어떻게 반응 해야 할까? 라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질문하셔야 합니다.

 

    오늘 두 비유 중에 첫 번째 비유는, 소위 불의한 재판관 비유입니다. 또는 과부의 강청기도 비유라고도 불립니다. 나는 오늘 첫 번째 비유를 통해 우리가 평소가지고 있던 기도에 관한 잘못된 해석이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시작하고 싶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강청하면 들어주신다라는 고정관념입니다. 5절에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7, “그 밤낮 부르짖는이라는 표현에 무게 중심을 둡니다그래서 이 말이 담고 있는 뜻이, “기도는 떼를 쓰면 쓸수록 응답될 확률이 크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주신다라는 고정관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원한을 풀어라는 말이 4번씩이나 등장합니다 (3, 5, 7, 8). 한 본문에 이렇게 많이 반복된 문구가 등장한다는 것은 그것이 중요한 성경적인 기도의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셋째, “하나님은 일정기간 기도를 듣지 않으시다가, 기도의 간절함을 보고 들어 주시기로 결정하신다라는 고정관념입니다. 4절에,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라는 문장을 하나님께 대입시켜서 그렇게 생각합니다그러나 이것 또한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늘 첫 번째 비유의 해석을 예수님이 먼저 해 주시고 시작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가장 정확합니다.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라고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 미리 알려주십니다. 비유의 내용과 이유는, “항상 기도하되 포기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입니다. 스토리 라인을 한번 살펴봅시다.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2)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말하자면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관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자기 중심적인 관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옵니다그 과부는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그것을 좀 해결해 달라고 말합니다만약 그 재판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면, 분명히 성경 말씀에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27:19)라는 말씀때문에라도 과부의 말에 처음부터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재판관은 이방인 관리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두려워 떨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본인은 민주주의 방식으로 백성들의 선거를 통해서 뽑힌 지방의 관료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환심이나 인기를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찮은 사람들의 소리를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4,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라고 했던 것입니다그런데 갑자기 이 과부의 청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과부가 자신을 번거롭게 하고 귀챦게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5).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여러분우리가 이 말씀으로 절대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도 마치 불의한 재판관처럼이라고 해석해 버리면 안됩니다. 이 비유를 처럼으로 해석해 버리면, 하나님을 재판관에 대비시키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과부에는 신자라는 단어를 짚어 넣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겠지요. “하나님은 신자가 밤낮 부르짖으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신다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성품을 많이 왜곡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은 마치 계획도 없으시다가 신자가 번거롭게 하니까 그제서야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즉흥적이고 마지 못해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수동적인 하나님이 되어버리십니다.

   

 

 성경은 기도 응답의 유무가 신자의 정성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7절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라는 구절의 무게 중심은 밤낮 부르짖는에 있지 않습니다. 밤낮 부르짖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의 의도는, 마치 과부처럼 온갖 정성을 다 들여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더니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식의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갓난아기가 젖을 달라고 울 때, “그래 한 5분만 울어봐 그러면 엄마가 젖을 줄지 안 줄지 생각해 볼게라고 하는 엄마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신자의 기도의 정성을 기다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없어도 온 우주를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나라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다스리십니다. 그러나 마치 우리의 기도가 없으면 안되실 것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마치 교회가 안될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을 것처럼 우리를 기도케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의 기도의 정성을 보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입니다그것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의 무게 중심은, “택하신 자들입니다기도 응답은 신자의 정성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이 감동하여 주는 선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이기 때문에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의 정성에 의해 응답유무가 결정되면 그게 얼마나 잔인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정성을 한번 보고 응답하실지 아니하실지를 판단한다고 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인간의 정성의 기준을 성경 어디에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습니다예를 들면, 기도를 하루에 3번씩 적어도 40일은 해야 한다 라고 제시하셨다면, 이런 기도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할 수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기준에 충족한 사람에게 기도를 응답해 주시기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결정하셨다면그때부터 하나님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지켜주고 기쁨을 주기 위한 도깨비 방망이나 알라딘 요술 램프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응답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인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이 만약 정성에 있다면, 그것은 일종에 노동입니다. 노동은 뭡니까? 대가를 받는 것입니다. 10시간을 일하면 10시간에 해당되는 임금을 받습니다. 만약 기도가 정성에 의해서 응답을 받는다면 그것은 노동의 가치와 같이, 내가 기도한 만큼 대가로 기도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것을 주시고자 하는 원대한 뜻은 사라지고, 오직 신자가 기도하는 정성에 따라서 기도 응답의 유무가 결정되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기도응답의 key가 하나님께 있지 않고, 신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 되므로,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 기도응답이 사람의 정성에 달려 있다면, 누구든지 40일 작정기도니 10일 금식기도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하기를 그 기도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낼 수 있다는 인간중심의 기도가 될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찮은 신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청하여 기도하지 않아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비유 본문을 과부처럼 강청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진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본문은 신자가 과부처럼 들어주실 때까지 강청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강청하여 기도할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6:8,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귀머거리가 아니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시켜야 알아 듣는 지식에 제한 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큰 소리 내어서 기도하지 않아도 들으시고, 때로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의 기도를들으십니다. 하나님은 과부처럼 떼쓰지 않아도, 강청하지 않아도 기도를들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스스로 이룰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기도라는 의미는, 내 힘으로는 도무지 이룰 수 없기 때문에 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맞다면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해서하나님을 설복시킬 수 있다는 교만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설득할 대상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사람을 설득하십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타이밍에 사람을 설복시키십니다기도 중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인내하도록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꺾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십니다.

 

    기도에 대해서 신자들이 범하는 실수 중 가장 흔한 것이, 내가 더 애써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이 비성경적인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핵심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 응답이 아직 오지 않는 이유는나의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오늘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이 의미는 인간편에서 보면 포기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는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권적으로 사람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시되, 사람의 소원에 얽매이지 않고 일하십니다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되 하나님이 원하시는 시간에 하실 것이므로 그때까지 낙심치 말고 항상 기도하라

 

    저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그때 제가 살던 시골에는 수도시설이 없었습니다우물을 파서 두레박으로 길어서 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극심한 가뭄을 겪었던 기억이있습니다. 그때에는 우물이 말라서 물이 없습니다. 오늘날 처럼 물을 파는 시절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구름이 끼기만 하면, 집에 양동이와 세숫대, 대야 할 것 없이 총 동원해서, 처마 밑에 두었습니다비가 오면 빗물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치우기도 귀찮을 뿐더러혹시 소나기라도 오면 미쳐 빗물을 받지 못할까 봐, 날이 쨍쨍한 날도 처마 밑에 양동이들을 줄줄이 놔두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기상예보가 과학적이지도 못했고, 실시간 예보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9시 뉴스 때나 솥두껑으로 자라 잡기식의 일기예보에 의지하는 미개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그런데 정말 어느 날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양동이에 한 가득 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비가 내린 이유가 뭘까요? 1. 양동이를 계속 받쳐 두었기 때문에, 2. 비가 내릴 때가 되어서. 답은 당연히 2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 응답의 소낙비를 내려주실 때, 우리가 계속 기도라는 양동이를 받쳐 두어서 응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실 뿐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응답 주실 때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응답이 언제 되실지 모르기 때문에, 그 응답을 받기 위해서 기도의 양동이를 항상 처마 밑에 받치고 있듯이, 늘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그러나 신자의 의무는 응답 될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를 보면 이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바리새인 그리고 세리 두 사람이 마침 같은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바리새인이기도하다 보니 옆에 세리가 기도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기를 자신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했습니다.(11). 그리고 자신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나님께 자신을 PR했습니다. 분명히 바리새인은 자신이 기도응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세리보다 있고그 누구보다 응답을 받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13절 보니,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합니다. 세리는 자신은 기도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세리가 바리새인보다훨씬 의롭다.” 성경에 보십시오. 기도를 의인과 관련하여 말씀하십니다. 벧전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5:16,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성경은 줄 곧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간구를 꼭 들으신다는 것입니다그런데 롬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의로 기도하는 것입니다나의 의로는 도무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가능합니다이게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중보 하시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중간에서 중보역할을 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성립 요건입니다기도는 주님의 중보 없이는 절대 안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보증이 없이는 기도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자는 기도의 자격이 없으며, 고로 기도의 응답도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가 힘이 잃습니다. 왜 일까요? 주님의 공로는 없고, 자신의 명분과 열심만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평소에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은혜와 능력은 도무지 없으면서, 하나님께 수 없는 주문서만 날리기 때문입니다. 주님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계속 내 놓으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기도가 아닙니다기독교 신앙의 기도는,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보증을 받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주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며, 무능한 사람이며,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치 않으면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말하는 것이 엉터리입니다.자신은 전혀 십자가에 대한 감격도 영성도 없으면서, 기도의 응답이 있을 것이라고기대하는 것은, 끊어진 다리 앞에 서서, 내가 발을 내 디디면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단 하나뿐인 다리입니다예수님에 대해 자신을 죄인이라고 늘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자격이 없으며,기도 응답은 당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한 없이 약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고백이 있는 자만이 주님의 중보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한없이 어둡고 못남을 인식하는 자만이 하늘의 밝고 빛나는 보좌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기도는 자신의 약함을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내가 앉아 있던 인생의 보좌에서 내려와 그 자리에 주님을 앉히시는 과정이 바로 기도입니다. 인생의 대장이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하는 과정이기도입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내가 가장 선봉에 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장 선봉에 서서 나를 위해서 싸워 주시는 것이 기도입니다.

 

    5: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여기에는 두 대장이 나옵니다. 하늘 나라의 군대 대장과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입니다하늘 나라의 군대 대장은 예수님의 현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은 여호수아입니다. 이 대목에서 성경은 예수님이 대장 되심을 여호수아가 대장인 것에 어렴풋이 예표합니다그런데 여호수아도 결국 주님이 대장 되심을 인정해야 하는 장면으로 묘사됩니다. 여호수아가 아무리 이스라엘의 대장이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군대의 총 사령관 되심을 이 구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그래서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그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라는 뜻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이 예수라는 말의 히브리식 발음이 바로 여호수아입니다결국 똑 같은 단어지요. 결국 우리 인생의 구원자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며그분이 곧 우리 인생의 총 사령관 되심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대장의 자리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대장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오직 예수님께서 선봉장이 되셔서 모든 것을 일하시도록 하는 나의 삶의 고백입니다

2/28/2016 6:24: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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