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00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출 4:27-31
27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28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행 7:35-43
35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1)표적을 행하였느니라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ㄱ)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2)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ㄴ)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길게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산헤드린 앞에서 마지막 순간에 들고 나온 한 장면은 인상적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산 아래 백성은 아론을 설득하여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보며 기뻐했다. 스데반은 이 사건이 단지 과거의 한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조상에서부터 지금 자신 앞에 앉아 있는 산헤드린 의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한 줄기 흐름이라고 진단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견디지 못해 보이는 무엇을 만들어 그 자리에 세우려는 마음, 그 마음의 끝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리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진단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우상이라는 말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우리는 자신을 그 단어 바깥에 두기 쉽지만, 칼뱅의 오래된 표현대로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보이지 않는 분을 사모하면서도 그 보이지 않음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다.
문제는 이 갈망의 뿌리 자체가 좋은 것에서 시작된다는 데 있다. 우리 안에는 절대자를 향한 진심 어린 갈망이 있고, 그 갈망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통해서만 채워진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영이신 분을 만나고 그분 안에 살기 위해서는 부단히 육신과 물질의 한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분을 기억하고 생각하도록 돕는 도구가 필요하다. 예배 때 켜는 촛불, 빵과 포도즙으로 나누는 성찬, 예배당의 십자가 같은 상징이 그것이다. 본래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분을 향하도록 돕는 손가락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 자체를 신성시하기 쉽다. 도구가 어느새 목적이 되고, 그분께로 가는 길이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광야의 송아지도 본래 백성의 종교적 갈망에서 출발했다.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인도할 무엇이 필요했고, 손으로 만든 신을 통해 그 공허를 채우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갈망은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출애굽기 4장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준다. 모세가 미디안에서 돌아오자 아론이 그를 마중 나가고, 둘은 함께 이스라엘 장로들 앞에 선다. 아론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모세는 백성 앞에서 표적을 행한다. 백성의 반응이 짧게 기록되어 있다.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여기서 백성은 손으로 만든 무엇 앞에서 기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난을 살피신 보이지 않는 분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같은 백성이 광야에서는 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서 기뻐했고, 여기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는 자리와, 자신을 찾으신 분 앞에 머리를 숙이는 자리. 이 두 자리 사이를 매일 오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정직한 모습이다. 시편 100편의 시인은 그래서 노래한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우리가 그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다. 이 한 줄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도구를 우상으로 만드는 그 익숙한 흐름에서 한 걸음 비켜설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잡히지 않는 분을 잡으려는 저의 조급함을 용서하소서.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기보다, 저를 찾아오신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하소서. 주님을 가리키는 도구들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분별의 마음을 허락하소서. 우리를 지으신 분이 주님이심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