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복음7: 회개에 합당한 열매(눅13:1-9, 2016년2월14일)
제가 전도사 시절에 섬기던 교회에 목사님을 정말 힘들게 하는 장로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그 장로님과 마음을 같이하는 몇몇 안수집사님들이 있었습니다. 이들도 합세하여 사사건건 목사님을 반대하고, 힘들게 했습니다. 결국 목사님이 견디질 못하고 그 교회를 목회 하신지 18년만에 사임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개월 후에, 목사님을 내보내기 위해서 앞장 서던 장로님은 간암으로 죽었고, 비슷한 시기에 그 장로님의 오른팔 격이던 안수집사님의 대학생 딸이 교통사고로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들리는 얘기는, 그 교회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다”라고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편협한 사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인과응보 사상입니다. 선한 일에는 선한 결과가 따르고, 악한 일에는 악한 결과가 따른다라는 사상이죠. 불신자들은 이것을 “천벌”이라는식으로 표현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라고 표현합니다. 과연 이것이성경적인 믿음일까요?
제가 신학대학원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가 배호주라는 사람입니다.그 친구는 저와 3년동안 기숙사 방을 같이 쓸 정도로 정말 가까웠습니다. 이 친구가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어느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을 때,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교회교역자수련회를 섬진강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 물에 뛰어들었는데, 순간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저는 미국에 있으면서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고 한참말을 잃었습니다. 제가 제일 친했던 목사이고, 또한 그는 평소에 화를낼 줄도 모르고 순진하면서도 영혼을 너무 사랑하는 신실한 목사였습니다. 나는 이 배목사의 죽음의 이유를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시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악한 사람이 죽게 되면, 당연히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선한 사람이 어느 날 불의의 사고를 만나면그 이유를 찾기가 힘듭니다. 혹자들은 그런 경우 겉으로는 선해 보였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시는 악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두 사건 이야기를 꺼내면서,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1절,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에 관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정확한 기록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대체적으로 알려진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지역을 통치하는 로마 빌라도 총독에게 눈에 가시 같은 동네가 있었는데,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이 로마를 전복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무장한 일명 열심당원들의 본거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갈릴리 사람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빌라도 총독은, 예루살렘에 방문하는 갈릴리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잡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는 그 죽인 사람들의 피를 자기들의 제사의 제물의 피에 섞어서 드렸다는 내용입니다. 이 때 유대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저렇게 유대를 위해서 애를 쓰는 열심당원들도 무참히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피를 이방인들의 제사에 섞어서 사용하는 치욕을당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한 것입니다. 죽임 당한 그 갈릴리 사람들이 뭔가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2절에서, “이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개인이 당하는 어려움은 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생각은 틀린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실로암 망대 붕괴사건”(4절)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다 알고 있는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마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삼풍백화점사고, 성수대교붕괴사고 하면 다 아는 것처럼, 그 시대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건인데, 실로암 연못과 연결되는 수로 공사 때 세워진 타워가 붕괴되면서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 18명이 그 자리에서 죽은 사건입니다. 이때 죽은 18명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어서 죽은 줄 아느냐?”라고 예수님이 또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번 똑 같은 반문을 하십니다. “이 죽은 사람들이 갈릴리와 예루살렘의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2,4절) 그리고 이어서 똑같이 두 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 5절). 이 대구를 이루면서 두 번씩 반복된 이 두 구절의 본 뜻은 뭘까요?
혹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는 말씀을 곡해해서, 빌라도에게 이유 없이 비참하게 죽은 갈릴리 사람들과 수로공사 타워가 쓰러져 깔려 죽은 18명의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이 죄를 더 많이지어서 빨리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너희들은 죄가 좀 덜하기 때문에 아직 살아 있다는 그런 논리를 뒤 엎으십니다. 이미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나, 살아 있는 너희들이나 똑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들도 반드시 죽어야 할 죄인이지만 아직 살아 있는 그 자체가 기적 같은 일 아니냐?라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살아 있을 동안 회개치 아니하면 마치 저들이 죽었듯이 너희들도 결국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구원론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오해를 갖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 홍수 사건에 대한 이해입니다.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지면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물로 심판하십니다. 이 장면을 읽는 오늘날 신자들은 생각하길, 그 시대에는 얼마나 죄가 많았길래 저렇게 하나님이다 쓸어버리셨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래도 내가 사는 세상은 적어도 노아시대 때 보다는 죄악이 덜 하기 때문에 이렇게 심판 받지 않고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홍수 심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죄가 덜하거나, 노아시대 때보다 의로워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9:15-16).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며, 그것을 지키시기 위해서 오래 참고 계시는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주의 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의도는 항상 “동기화, 동질화”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이, 오늘날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저들과 같이 실수하고, 범죄하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자신에게 비추어 동기화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를 시켜서 나는 제법 괜찮고,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적 우월주의”죠. 이것은 성경의 의도가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오늘날 나의 현재의 모습이며, 그러므로 보잘 것 없는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이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심으로, 그것이 나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서, 오늘날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잘못된 신앙사상을 바로잡고 넘어가야 합니다. “인간사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와 고통의 문제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다”라는 믿음입니다.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시시콜콜한 잘 못에 대해 즉결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약 인간의 잘못에 대해 즉결 심판을 단행하시는 분이었다면, 오늘날 인류는 이미 6천년 전에 멸종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것을 먹을 경우 하나님의 경고는, “너가 정녕 죽으리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아담을 경고 하신 대로 즉결 심판하여 사형에 처해 버리셨다면, 인류는 2세대가 탄생도 하기 전에 끝이 나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에 대해 곧 바로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은혜로 유보하십니다. 그러고는 서서히 늙고, 죽어가게 하시는 방법을택하셨습니다. 결국 930세에 인류 최초의 인간이 죽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형집행은 900년 넘게 유보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 이후 후세대들은 서서히 수명이 줄어들어서 고작 100년을 채 넘기지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심판을 유보하시고 늦추시는 성품을 구약성경 내내 보여주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적어도 8번 이렇게 표현합니다.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기사용된 4단어, 은혜, 긍휼,노하기를 더디, 인자…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대표적인 사랑의 성품인데요.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반대의 경우,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므로, 결국 용서도 대가를 치러야 받을 수 있는, 조건적인 용서라도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공의의 성품이 마치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개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요1서4:8,16). 둘째, 성경은 또한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주라고 가르칩니다(시7:11; 58:11; 94:2, 롬2:16, 벧전1:17; 2:23).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은 서로 충돌되거나 서로 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대게 3단계로 사랑과 공의를 시행하십니다. 1. 죄에 대한 심판을 오랫동안 참으시면서 유보하십니다. 2. 심판하십니다. 3. 그러나 결국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요약하면 “사랑—공의—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패턴은 구약성경에 계속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의 문제가 하나님께서 즉결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세상의 모든 재난은 누구나 만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사고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만날 때, 자꾸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못 생각하는 것이 뭡니까? 우리의 생각의 틀에 하나님을 짚어 넣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이라는 틀이 있습니다. 상식이라는 것은“예측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평소 공부를 늘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점수로 보면하버드에 분명히 들어갈 점수입니다. 그런데 낙방을 합니다. 그런데 늘 2등하는 친구는 하버드에 합격을 했습니다. 이때 생각의“상식”이 깨집니다. 그러고 나면 깨져 버린 상식의 틀에 하나님을 대입시킵니다. 1등하던 친구에게는 너가 평소에 공부만 열심히 하고, 교회에는 자주 빠지고, 수련회도 안가고 하더니만 하나님께서 너를 깨닫게 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랬다는 해석을 내 놓습니다. 그리고 2등 했던 친구는 하버드에 들어가기에 아슬아슬한 점수였는데, 평소 예배를 잘 드리고,충성스럽게 교회를 봉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는 해석을 내 놓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전혀 옳지 않은 인생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의 틀안에 넣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사55:8,“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반드시 가져야 할 믿음은,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차원적이며 완벽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를 방정식처럼 딱딱 맞게 알아 맞출 수 있는 공식이 있으면 얼마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적용되며, 모든 사건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신비로운 하나님만의 우주를 이끄시는 능력과 작용이며,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식의 틀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입시키면 반드시 틀립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때로 득세하도록 내버려 두시고, 오히려의인이 고난 가운데 처하도록 합니다. 왜 그런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고난의 의미가 뭐였는지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겪는 고통이 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모든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대게 다 인간의 실수와 탐욕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너뜨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8명은 자신의 죄가 커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의 제1원인이 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수와 탐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와 재난은 하나님의 제1원인이 아니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적극성”과 “소극성”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주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죄의 원인이 하나님이 되시므로 그럴 수 없습니다.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의 “소극적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허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는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롬1:24, 26)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이 실로암 망대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던 부실공사의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이 수로공사타워의 안전감독관이 뭔가 소홀히 한 것은 없는지, 미장공이 실수 한 것은 없는지, 아니면 작업소장이 뇌물을 받고 값싼 재료를 사용한 것은 아닌지 등등의 원인을 밝혀 보면, 분명히 거기에는 사람의 욕심과 실수가 잔뜩 개입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 하나의 잘못과 욕심들이모여서, 부실공사가 되고, 결국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자주 저지르는 믿음에 관한 실수가 뭡니까? 고통의 원인을 자꾸만 하나님께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상한 이분법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어떤 안 좋은 일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 따지려고 드는 습성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셨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인생의 무슨 수호신정도로 격하시키는 행동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요? 인생이 성공가도를 달릴 때에는 전혀 하나님 생각지도 않다가 뭔가 꼬이는 일이 생기면 그제서야 하나님 생각합니다. 왜 안 도와 주셨냐는 것이지요?
나는 한 번씩 아이들이 늦잠을 자서 학교에 지각하는 일이 생기면 자주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아빠, 왜 저 빨리 안 깨우셨어요? 아빠가 안 깨워서 지각했잖아요?” “아빠는 두 번이나 널 깨웠단다. 너가 안 일어 났을 뿐이지…” “그러면 뭐해요? 일어날 때까지 깨웠어야지요.” “아빠가 어젯밤에 일찍 자라고 했지? 너가 늦게 자서 그런 걸 왜 그래?” “그건 숙제 한다고 늦게 잔 거 쟎아요?” “솔직히 말해봐, 너 어제 낮에서 컴퓨터 한다고 놀고, 친구 집에서 논다고 숙제 미리 안 해서, 밤늦게 한거잖아?” 말을 따지고 따지고 들어가 보면, 결국 자기 탓입니다.
인생은 참 희한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편의주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편의주의, 자기중심주의가 되면 엉터리 신앙이 됩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하나님 중심주의라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중심주의는 잘 된 것은 하나님께 돌리고, 잘 못은 자기에게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매 순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애쓰고, 그렇지 못했을 때 스스로 굉장히 아파하고, 회개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탓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도 파전을 부치다가 깜빡 다른 일을 하는 사이에 파전이 새까맣게 타버린 것을 가지고,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따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왜요? 그것은 자기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파전을 부쳐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희한합니다. 파전이야 타버려도 버리고, 다시 부치면 된다고 생각하니 자기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좀더 큰 금전적인 손해가 오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계획한 것이 자꾸만 꼬일 때에는, 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파전은 타버리고 해도 하나님께 따지지 않으면서도, 좀 더 큰 것에는 왜 하나님께 따져 물을까요? 그것은 황금만능주의, 물질주의, 물량주의에 물든 인간의 죄악 된 마음 때문입니다. 내가 금전적으로 큰 손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내가 감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큰 일들이 생길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인생은 작은 일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큰 일은 “하나님이 통제하셔야만 한다”고 생각할까요? 이것은 나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는 않으면서, 항상 나를 보호하시고 잘 되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가장 쉽게 내 뱉는 말이 뭘까요?나는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할 일을 다 했으니, 하나님만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참 단순한 신앙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이 대단하게까지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큰 함정이 있습니다. 기도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두 가지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첫째,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 내야 합니다. 둘째,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 자기 열심만 다하면, 인본주의가 됩니다.
만약 이렇게 해서 잘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없고 자신의 업적만 남습니다. 인본주의, 영웅주의죠. 기독교에는 영웅은 없습니다. 오직 영웅은 그리스도만 계실 뿐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해야 될 일은 열심히 하지않고, 기도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주의가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은혜주의는 아닙니다. 은혜주의는 인간의 산물입니다.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쉽게 받게 해 달라는 심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도 성경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오늘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시는 경고의 메시지가 뭡니까?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한 농장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6절)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유심히 읽으면 이상한 대목입니다. 왜 농장주인이 포도원에 포도만 심으면 됐지, 무화과나무를 심습니다. 원어성경에 보면,“무화과나무 한 그루”라고 단수로 나옵니다. 포도밭에 포도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한 그루를 심었다는 것은 주인의 특별한 의도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무화과 열매를 먹고 싶어서 일 겁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원지기에게 명령합니다. “찍어 버리라, 땅만 버린다” 농장주인이 성격이 불 같거나 성미가 급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을까요? 분명히 무화과나무가 열매도 맺지 못하는데 그대로 내 버려두면, 포도밭에 포도들이 자라는데 땅의 영양분만 빨아먹고, 오히려 포도농사마저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빨리 찍어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원지기가 예상외의 요청을 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 후에 열매가 열릴수도 있고, 그때 가서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 버리십시오” (8, 9절). 그러고는 이 본문이 끝이 나버립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 예수님은 “너희가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실로암 망대 사건의 사람들처럼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직후에,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시다가, 갑자기포도밭에 심은 무화과나무가 나오고, 주인도 나오고, 과원지기도 나오는데, 그러다가 얘기가 급 마무리 되어버립니다. 비유 이야기에는 무화과나무가 그 다음해에 살아남았는지, 찍혀 버렸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말 할 것도 없이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택해서 포도밭에 심을 정도로 관심을 보이는 주인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 백성들을 통해서 의의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못해서 찍어 버리려고 합니다. 이 때 과원지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합니다. 조그만 더 기회를 더 달라고 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회개를 촉구하시는 데, 이제 더 이상 오래 기다려 줄 수 없는 다급함을 보여줍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가 많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빨리 회개하고, 의의 열매를 맺어야할 시기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하여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시고 용납하셨는지를 잘 보여주십니다. 모든 인생은 더 선하거나 더 악할 것도 없이, 똑같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로암 망대 붕괴사고에서 깔려 죽은 사람들도 죄인이고, 여전히 살아서 숨쉬고 있는 사람들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너희들이 살아있느냐? 그러면 너희들에게 지금 회개하라고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니, 지체하지 말고 빨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통해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비평이나 판단은 얼마나 명석하고 빠른지 모릅니다. 한국에 개성공단 폐쇄 사건이 일어나니까, 온 국민이 두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무능한 정부가 오판하고 대책 없이 했다는 것입니다. 또 한 쪽은 북쪽이 저렇게까지 나오는 데, 정부가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두둔합니다.
여러분 신자는 나라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의 가정에, 나의 신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말로 떠들어 대고 비평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손 가락질 하는데 관심을 가지는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는 것이구나 생각하고 가장 먼저 주님께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삼상7장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블레셋이라는 강대국이 쳐들어 와서 위협합니다. 이때 사무엘이 했던 것은 미스바에 사람들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삼상7:6).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10절).
사사기에는 나라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마다 그들이 즉각했던 것이 하나님께 회개하며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때마다 사사를 세우셔서 국난을 극복하게합니다.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면서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에스라 9장과 느헤미야 9장을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다”(느9:31).
저는 어제 페이스북을 보니, 개성공단 폐쇄문제로 인해 기독교 신자들끼리도 편이 두 편으로 나뉘어서 누가 옳니 누가 그러니 하면서 서로 공방하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기독교 신자의 태도는 어떤 일을 만날 때, 항상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뭔가를 가장 먼저 살피는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당연히 나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잖아요?그러면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부부간에 알콩 달콩 머리를 맞대고 시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긍휼을 좀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가장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진에 조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판단도 내려놓으세요. 다른 사람을 향한 손가락을 돌려 자기자신을 향해 가리키세요. 그리고 엎드리셔야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상황을 주시나?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고 나면 자연히 하나님 앞에엎드리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긍휼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 중에 그 누구도 더 선한 사람이 없고, 덜 악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권리가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다 망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과수원지기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냥 찍혀서 불구덩이에 던져져 버릴 쓸모 없는 인생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매일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신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