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사람복음6: 바리새인의 정의와 사랑(눅11:37-44, 2016년2월7일)

사람복음6:바리새인의 정의와 사랑(11:37-44, 201627)

     저는 지난 한주간을 보내면서 뉴스와 온라인 미디어를 접하면서 서로 다른 사건인데, 동일한 한단어에 주목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 단어는 정의(justice)”입니다.

    어제 런던에서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연설이 있었는데연설 직전에 영국 남자 한 사람이 갑자기 뛰쳐나와 연설단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침묵시위를 했습니다. 잠시 한 20초 정도 서 있다가 저지를 당했지만그 피켓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었습니다. “Justice for comfort women”—위안부에게 정의를! 해필이면 유엔 사무총장이 한국사람인데, 한국사람들이 가장 아파하고 분내는, 역사적 아픔인 종군위안부 문제를 한국사람이 아닌, 영국사람이피켓을 들고 그렇게 하니, 그 장면 하나만으로 굉장히 아이러니 하면서도 뭔가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장면이었다고생각합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가 정의입니다.

    며칠 전 또 나는 우연히 버니 샌더스(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가 일전에, 기독교대학인 리버티대학교에서 연설한 것을 접하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유투브를 통해서 봤습니다. 27분짜리 동영상인데, 샌더스가 연설중에 가장 많이 쓴 단어가 정의였습니다그러면서 소위 황금율이라고 부르는7:12,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정의란 받고 싶은 만큼 대접하는 것이라고 연설했습니다. 심지어 아모스5: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라는 말씀까지 인용합니다나는 샌더스가 연설 초반에 말한, “저는 동성애자의 권리, 특별히 결혼 할 수 있는 권리를 지지합니다라는 말한 것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말할 때 청중이 환호하고 박수치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입에서 곧장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정의를 성경적으로 해석하려는 뻔뻔스러움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회의 부조리와 정의롭지 못함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짚었다고 봅니다.

     이틀 전 페이스북을 보다가 누군가 글을 올렸는데, 이런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오늘부터 온라인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00 교단의 목사님들과는 친구를 끊겠다는 것이었습니다이유인즉, 최근 서울에 이름만 들어도 아는 두 명의 모 목사의 파렴치한 행각에도, 00교단이 두 목사를 솜방망이 징계로 감싸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교단에는 정의는 없고 사랑만 있는가?”라는 것이 그 분 글의 요지였습니다그래서 오프라인에서야 만나서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하겠지만, 그런 결정을 교단이내렸을 때 침묵했던 그 교단의 목사와 온라인상에서 페이스북 친구 끊기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힘들어서 견딜수 없을 것 같다고 글을 적어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꾸짖으시면서, “정의사랑이라는 단어를 42절에서 쓰십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에게는 도대체 정의도 사랑도 없다라고 야단을 치시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이 자기 집에 예수님을 점심식사 초대를 합니다. 예수님을 곤란에 빠트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건지, 아니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마음 문에 열려서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좋은 계기가 되었을 것이므로 그 초대에 응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식사습관은 이렇습니다. 먼저 집안으로 들어가면, 손 씻는 물그릇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물을 한컵 떠서 양손을 모아 떠서, 물이 손목 사이로 흘러내리도록 손을 치켜듭니다그러고 나서 자기 식탁 자리에서 왼손을 받치고 비스듬히 눕습니다. 그러고 나면 집안종들이 와서 발을 씻어 줍니다. 그러고는 밥을 먹습니다. 이것이 밥먹기 전의 절차입니다. 유대인에게 손을 씻는 행위는 위생상 씻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입니다. 유대인 정결의식법에 손을 씻고 먹어야 부정하지 않고 정결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손 씻는 물그릇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시고는그냥 식탁 앞에 비스듬히 앉습니다. 이 장면을 본 바리새인은 38절에, “보고 이상히 여기더라고 했습니다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생각하고는 예수님께 대놓고 왜 손을 씻지 않습니까?”라고 말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성경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바리새인의표정이 예수님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계기로 예리한 가르침을 쏟아냅니다. 39,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직설적인 말씀을 쏟아냅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점심초대를 받아서 어느 집에 들어가자마자 차려놓은 음식 앞에서, 초대한 집의 주인에게 음식그릇들은 너무 깨끗한데, 당신 속은 온갖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라고 했다면, 그것 같이 결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집 주인장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데도, 하나님께서기뻐하실 것이라고 믿고 행하는 바리새인들의 그 마음 중심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 못 되었는가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외형은 번지르르 한데 실제 마음은 그렇지 않은 속과 겉이 다른 것에 대해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구제하는 일에 대해서 지적하십니다. 41,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이 말씀은 구제의 외적 선행도 중요하지만, 그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1세기 유대인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정말 거룩하고 자비로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할 일을 다 했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고 스스로 자신에게 점수를 주었습니다. 구제 자체가 정말 선한 일이었지만, 그들의 문제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긍휼한 마음으로으로 구제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속으로 우러나오는 긍휼한 마음으로 구제할 때나타나는 현상은 뭘까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진짜 있는 사람은 구제받을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합니다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진심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구제받을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제원칙을 세우십니다.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그리고 그 다음절 5절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고 표현하신 것은 분명히,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모르게 할 정도로 은밀하게 하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만큼 구제는 은밀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매년 구제를 합니다. 교회 안에도 하고 교회 바깥에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도 조직이다 보니, 교회의 재정을 목사 마음대로 결제해서 쓸 수 없기 때문에, 최소한의 결정을 운영위원회에서 내립니다저는 운영위원회에서 구제결정을 내릴 때 꼭 이 말을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합시다.”

    나는 이 말씀을 저 개인에게만큼은 엄격하게 적용하는 편입니다그래서 부부에게 조차 말하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제 목회 소신중에 가장 철저하게 지키는 것 중에 하나가, 아내에게 말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드러는 부부사이에 비밀이 어디있느냐?라고 반문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부부사이의 개인 문제에 있어서 비밀이 있으면 안되겠지만, 부부사이에도 반드시 말하지 않아야 할 공적비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성안교회 윤장운 목사님 밑에서 목회수련을 하면서 한가지 배운 사실은, 교회의 중직자 특히 당회는 공적결의 사항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습니다. “뉴스 엠바고라는 말이 있지요기자가 내용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국가나 기업이 어떤 사실을 공적으로 발표하기 전까지는, 보도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회도 이런 엠바고가 있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옛날부터 안방 당회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뭔가하고봤더니, 당회에서 결정한 사항이 그날 밤 부부침상에서 나눕니다. 그러고는그 다음 당회에 장로님이 들어와서는, 결정한 사항을 뒤짚는 것입니다. 이유는 아내 권사님의 말씀을 너무 잘 들은 나머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아직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같이 작은 교회 특징을 보면, 소문이너무 빠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부임하고 나서 한번씩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어젯밤에 이야기한 것이 오늘 아침이면 교인들 대부분이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가족적인 부분에서 좋은 점이 많습니다. 슬픈 일을 당한 사람이 있을 때, 기동력이 있습니다금방 연락해서 다같이 가서 위로해 줍니다. 기쁜 일이 있어도 마찬가지 입니다.그 런 부분은 우리교회가 참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은밀성을 지켜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제입니다. 이 은밀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구제의 은밀성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구제에 은근히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거나 그 선행을 통해서 도움을 받은 사람을 은근히 지배하려는 맘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이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2,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드디어 여기에 공의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새번역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에는 공의를 정의로 번역하고있습니다. 사실 정의라고 하는것이 훨씬 쉽게 와 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십일조는 잘 드린다고 말씀하면서박하, 운향, 모든 채소라고 언급합니다. 특별히 이런 식물들의 이름을 거론한 이유는, 구약의 율법의 십일조 규례를 언급하기위함이라고 봐 집니다. 27:30,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의그 십분의 일이라고 명령합니다. 십일조 규례에는 곡식과 나무과실은있지만, 채소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더 엄격하게 십일조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없는 조항을 넣어서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민트, 운향이라는 약소식물 등 모든 채소의 종류별로 다 일일이 계산을 해서 십일조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 규율을 더 엄격하게 지키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십일조 정신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리고, 오직 헌금만 철저하게 계산해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레위기에 나오는 십일조 규례는 열심히 지켰지만신명기에 나오는 십일조 규례의 정신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14:28-29,“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신명기에나오는 십일조 규례의 핵심 정신은, “십일조를 정확히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규례에도 없는 것을 집어넣어서,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해 가면서 철저하게하려고 했지만, 정작 그 십일조의 정신인 사랑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변호해 주지 않고, 약자의 어려움들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십일조만 잘 했습니다. “정의의 정신이 없는 십일조를 잘 했던 것입니다.

    성경의 계명을 잘 지켜 행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면 소극적 순종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명령은 적극적 순종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15장을 보면,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라고 하면서 면제년 규례를 명령합니다. 이웃에게 꾸어 준 것을 칠년 째 면제하되, 빚독촉을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고는 이 명령으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명령합니다.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8).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 면제년을 명령하면서 빚을 면제해 주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가진 것을 부족한 사람에게 넉넉히 꾸어주라손을 펼쳐서 주라고 적극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명령을 하시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 오리를 가자 거든 십리를 가주라.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도 주라. 성경의 명령의 범위는 항상 적극적 순종입니다.

     그러고는 성경이 이런 약속을 주십니다.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5) 다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와 닿는지 모릅니다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이 성경의 이 구절을 굉장히 애용합니다.

    제가 설교 초두에 언급했던, 버니 샌더스라는 지금 미국 민주당 대선경선 후보가 리버티대학교에서 연설한 내용 중에, “너무 많은 부가 소수에게 집중된다고 말하면서 미국 사회 상위 0.1퍼센트가 하위 90퍼센트가 소유한 부와 맞먹는 수준의 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간당 8, 9불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일했는데도 자녀들에게 좋은 밥 먹이는 것조차 힘든 사람들이 수백 만 명이 된다고 꼬집었습니다그리고 미국에 백만장자, 억만장자들이 급증하는동시에 선진국 중 미국의 아동 빈곤률이 가장 높다고 말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수백만의 아이들이 배고픈 채로 잠자리에 드는 것은 정의가 아닐 뿐더러 비도덕적이다라고 연설했습니다. 연설만 들으면 얼마나 성경적인 연설입니까?

    나는 기독교인들이 성경에 하나님의 명령을 적극적인 명령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15:5절 말씀처럼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는 말씀이 실현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 자기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만큼만 실행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더 훨씬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 우연히 한국교육방송에서 한국 창원의 한 판사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이름이 천종호 판사였습니다. 그는 비행청소년을 판결하는 소년부 판사였습니다. 그의 재판현장은 다른 재판과 많이 달랐습니다. 비행청소년을 최종 판결하기 전에, 잘못을 한 청소년을 재판장에 꿇어앉힙니다. 그러고는 방청객으로 와있는 아버지를 앞에 세우고, 아버지에게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라고 합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10번을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냥 감정없이 말을 하다가, 다섯번, 여섯번째 정도 되어서,“아버지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할 때에는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정말 진심으로 아버지에게 사죄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또한 아이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가 미안하다. 아버지도 사랑한다라고 말합니다.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저분이 크리스천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래서 인터넷에 찾아보니, 정말 어느 교회 집사님이었습니다.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천종호 판사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 부산, 경남 7곳에 대안 가정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운영하면서 비행청소년의 재활치료를 돕고 있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직도 자기 집 주택대출을 다 못 갚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참 훈훈한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에는 판결을 굽게 하지 마라고 여러 번 명령합니다그런데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삼상8장에 보면,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움을 받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다고 성경은 밝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판결을 하면서 뇌물을 받고 엉터리로 판결을 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에 손상이 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천종호 판사가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면 적어도 그는 재판을 굽게 하지 않았고, 비행청소년을 부모에게 아름답게 돌려보내는 훌륭한 일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 순종을 합니다자기의 사비를 털어서, “대안 가정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다시는 비행청소년이 재비행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판사의 의무가 아닙니다. 다만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해서라도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판사 집사님과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의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또한 설교를 통하여, 바리새인의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드는 대체적인 생각은 아마도 이런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바리새인은 아니야” “바리새인은 정말 몹쓸 종교중독자들이지, 그러나 난 적어도 그렇지는 않아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본문 42절 말미에,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십일조 같은 명령도 철저히 지켜야 하지만, 또한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바리새인들은 규례를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반은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규례도 지키려고 애쓰고 동시에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애쓰고 있습니까아니면 소극적으로 순종하는 것도 힘들어 하고 있습니까?

2/8/2016 12:17: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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