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복음5:70인 제자(눅10장17-20절, 2016년1월31일)
오늘 본문은 70인 제자가 전도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기록된 내용은 누가복음 10장1절부터 16절까지 인데, 70명의 제자를 따로 세우고, 그들을 2인1조로 분류합니다. 그런 후 그들을 예수님이가시려는 동네에 먼저 앞서 보내셨다고 1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에서 등장하는 70인의 제자들을 두고, “70인 전도대”라는 말을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70인 전도특공대 같은 것도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2인 1조로 전도팀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전도팀의 이름을 그렇게 만들고, 시스템을 그런 방식으로 운영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70인을 따로 세워서 각 동네의 집집마다 보낸 이유를 두 번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가까이 왔다” (9절, 11절).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를 파송한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선포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전도팀들이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입니다. 오늘날 전도에 있어서 주 목적이 “교회 나오라”가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가도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도 교회 오라고 해서 교회를갔는데, 온갖 실망거리만 보고 집에 돌아가서는 “다시는 교회에 안 가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요? 그것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고 보기도 전에 피상적이고 인간냄새가 풀풀나는 모습만 먼저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날 교회에게 전도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기록한 본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라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록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70인 제자들에게 지시한 가장첫번째 사항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5절)였습니다. 그러고는 만약 그 집에서 그 평안을 받으면 그 빈 평안이 그 집에 머물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평안을 빈 사람에게 되돌아 온다(6절)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이 구절을 두고, 많은 신자들이 이상한 미신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인사할 때마다, 히브리어로 “평안, 평화”라는 뜻의 “샬롬! 샬롬!”이라고 하면서, 자기가 그렇게 인사했는데 만약 상대방이 샬롬을 받아주지 않으면 그 샬롬이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복이 된다고 믿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지시하신 것은, 기계적이거나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5절에서 예수님의 지시사항을 유심히 보면 예수님의 강조점이두 군데가 있습니다. ‘평안’이라는 단어와 “먼저 말하되”입니다. 예수님의 지시사항의 포인트는 “평안할지어다”라는 인사말을 하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사말을 그 어떤 다른 말보다 가장 먼저 하라는 지시사항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만약 어떤 집에 제자 두 명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집 주인과 얼굴이 마주칠 때 그 어떤 다른 말보다 이 말을 먼저 합니다. “평안할지어다!”(Peace to this house). 그런데 만약 그 집 주인이 막 화를 내면서 그렇게 말합니다. “아니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는 거요? 우리 집 애가 지금 병에 걸려서 다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얼어 죽을 평안? 썩 꺼지시요.” 그런데 어떤 다른 집에 가서 “평안이 이 집에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했는데, 그 집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집에 지금 아내가 귀신이 들려서 밤낮으로 자신의 몸을 해하는데,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소. 정말 나에게는 좀 평화가 필요합니다.”
“이 집이 평안할 지어다”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영적 노크”입니다.이 “영적 노크”를 할 때, 반드시 두 가지의 양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는 “썩 꺼지시요”라고 말하는 부류입니다. “영적 노크”에 거부반응을 하는 것이지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성경적인 단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강퍅한”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완고한, 고집이 센,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정말 나에게는 좀 평화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심령의 상태가 굉장히 굶주리고 가난해진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의 가장 첫 문장을 기억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요”(마5:3).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복의 전제 조건은,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구절들의 특별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1절)-“먼저 말하되이 집이 평안할지어다”(5절)-“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9절, 11절). 이 것을 간단한 도식으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고 봅니다.
“평강의 왕 예수님이 행차—70인 제자들이 “평안”의 노크—평강의 왕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함”
집집마다 모든 인생들이 겪고 있는 아픔과 절망 가운데서,예수님만이 진정한 평강의 왕이시며, 그 분만이 모든 고통과 질병과 문제의 늪에서 건져주실 수 있고, 그분 안에 있으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온 인류가 해산의 고통과 노동의 고통과 가난, 질병, 갈등, 이별, 죽음이라는 절망에 빠졌습니다.인생은 살면 살수록 좋은 날보다 슬프고 힘든 날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일생 중에 정말 행복했던 시간은 15분이 채 되지 않는다라고 했던 말이괜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 웃음으로 태어나지 않고, 울면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삼키면서 인생을보 내고, 결국 마지막에도 자식들의 눈물을 보면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부모의 임종을 지키던 모든 사람들도 똑 같은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수 천년 인간 역사 동안 반복되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 슬픔과 절망의 인생에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오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성경은 이 “평강의 왕”으로 오실, 그리고 이미 오신 예수님에 대해 4가지 큰 기둥으로 설명합니다.
1. 이사야 9:6,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평강의 왕이라”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2.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이 평강으로 왕으로 오실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지 700년 후, 그 예언이 이루어지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하늘에서 천군 천사들이 내려와 찬양을 하는데, 그 천사들의 찬양의 맨 마지막 대목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였습니다.
3. 그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제 온 인류의평화를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십니다. 이사야53:5,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루심으로 우리에게는 진정한 평화가 찾아 온 것입니다.
4.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요한복음20:19,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예수님의 구원의 흐름을 보면 시종일관 “평강”이라는 단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하길 메시야가 “평강의 왕”으로 오실 것이며, 예언대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천군천사들이 찬양하길, “평화로다”라고 했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면서 각 집에 들어가, “이 집에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했으며, 공생애의 하이라이트인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그것이 우리에게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 되었으며, 부활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가장 먼저 던진 한마디는 “평강이 있을찌어다”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평강이시며,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의 핵심은 “평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며, 세상 어떤 나라의 왕도 줄 수 없는 평강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14:27,“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고….”이것은 주님의 “절대평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이 절대평안은 우리의 환경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 가운데 임하는 평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괴로울때나 슬플때나 힘들 때, 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만 허락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승리와 생명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보면, 70인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사역보고를 합니다. 그 핵심내용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임할 때 나타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영적 싸움에서 이미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창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원복음이라고 불리는 이 구절이 성취되는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믿겠다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예수가 신이라면 왜 십자가에서 그렇게 힘도 못써보고 죽느냐?라는 것입니다.그들은 예수님이 왜 십자가 처형대에서 죽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사람들이 조롱했던 말이 뭡니까? 마태복음27장은 두번 반복하여 기록합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2).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실패”로 봅니다. 아마 힘도 못 써보고 결국 남들은 그렇게 병도 낫게 하고, 귀신도 떠나가게 해서, 구원시키고는 정작 본인은 구원시킬 수 없는 실패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실패로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로 표현합니다. 골로새서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고전15:55, 57,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권세의 상징인 “죽음”을 깨트리신 것입니다. 실패가 아니라 “승리”지요.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으로 사단의 권세는 완전히 추락해버렸습니다.그래서 18절에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사역기간 동안 70인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사단의 권세가 이미 추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사단의 모든 공중 권세는 완전히 추락해 버렸습니다.
나는 실제로 오늘날 귀신 들린 사람들을 쉽게 보기 힘든 이유가 이 사실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믿습니다. 분명히 예수님 이전 시절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까지, 그 시대에는 마을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너무도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만 봐도 적어도 귀신에 대한 구절이 적어도 90번 이상 등장합니다. 그만큼 예수님 시절에 사단의 권세가 판을 치고 있었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단의 졸개들인 귀신들이 한 인생에게 들어가서, 그 인생을 망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의 일들을 완전히 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1서 3:8, “…하나님의 아들이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시는 시대에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마귀의 공중권세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셨고, 이제 사단은 맥을 추지 못하고, 그저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꽃피우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의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했고, 사단의 권세는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한 전쟁을 치루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는 유혹 받을 수는 있지만, 그리고 잠시 쓰러질 수는 있지만, 마귀에게 완전히 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마귀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전쟁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님의 시대때 만큼 많이 볼 수가 없습니다.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왕국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이미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70인 제자들의 흥분된 보고를 듣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고, 그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신 승리의 나라이기 때문에, 귀신들이 항복하고 벌벌 떠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이제 너희들이 정말 기뻐해야 할 사실은, “하늘에 기록된 것” 곧, “생명책”(계20:15, 시69:28, 빌4:3)에 신자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이미 도래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신자는 승리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까지 영적 전투는 계속됩니다. 때로는 유혹 받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낙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견디며 인내하며 온전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 이유는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며, 이미 어린양의 생명책에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져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