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배로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에, 그들은 바울과 몇몇 다른 죄수를 황제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2 우리는 아드라뭇데노 호를 타고 출항하였다. 이 배는 아시아 연안의 여러 곳으로 항해하는 배였다. 데살로니가 출신인 마케도니아 사람 아리스다고도 우리와 함께 하였다.
3 이튿날 우리는 시돈에 배를 대었다.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친구들에게로 가서 보살핌을 받는 것을 허락하였다.
4 우리는 시돈을 떠나 뱃길을 갈 때에, 맞바람 때문에 키프로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서 항해하였다.
5 우리는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 바다를 가로질러 항해하여, 루기아에 있는 무라에 이르렀다.
6 거기서 백부장은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서, 우리를 그 배에 태웠다.
7 우리는 여러 날 동안 천천히 항해하여, 겨우 니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는 맞바람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서, 크레타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살모네 앞바다를 항해하여 지나갔다.
8 그리고 우리는 크레타 남쪽 해안을 따라 겨우겨우 항해하여, 라새아 성에서 가까운 도시인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에 닿았다.
9 많은 시일이 흘러서, 금식 기간이 이미 지났으므로, 벌써 항해하기에 위태로운 때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충고하였다.
10 "여러분, 내가 보기에, 지금 항해를 하다가는 재난을 당할 것 같은데, 짐과 배의 손실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까지도 잃을지 모릅니다."
11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다.
12 그리고 그 항구는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므로, 거의 모두는, 거기에서 출항하여, 할 수 있으면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나기로 뜻을 정하였다. 뵈닉스는 크레타 섬의 항구로, 서남쪽과 서북쪽을 바라보는 곳이다.
2026년이라는 새로운 시간의 바다로 배를 띄우는 첫 주간입니다. 우리는 기대와 설렘,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이 항해를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7장은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을 그리며, 거친 바다 위에서 믿는 자가 어떤 존재로 서 있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이 탄 '알렉산드리아 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이 배에는 로마의 권력을 상징하는 백부장, 자본과 기술을 가진 선주와 선장, 그리고 다양한 목적을 가진 군중들이 타고 있습니다. 그 틈바구니에서 바울과 누가, 아리스다고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극히 소수이며, 겉보기에는 무력한 '죄수'의 신분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2026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직장, 학교, 사회라는 배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다수가 아니며, 때로는 세상의 힘에 밀려 조용히 지내야 하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과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 속에 살고 있습니다.
배가 '미항(Fair Havens)'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위기가 감지됩니다. 바울은 영적 직관과 경험을 통해 "지금 항해하면 생명까지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10절).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11절). 세상의 이치로 보면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항해 전문가(기술)와 배의 주인(자본)의 의견이 비전문가인 죄수의 말보다 합리적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다수의 사람들은 미항이 겨울을 나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더 화려하고 편안한 '뵈닉스'로 가기를 원했습니다(12절).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을 봅니다. 세상은 '전문성'과 '경제 논리', 그리고 당장의 '편리함'을 좇아 움직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더 좋은 항구(뵈닉스)가 있다"는 낙관론이, "멈춰야 산다"는 영적 경고를 압도합니다. 바울이 보기에 뵈닉스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번영과 안락의 길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은 바로 이런 위기의 순간, 선택의 기로에서 드러납니다. 평온할 때 바울은 그저 조용한 죄수였지만,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는 배 전체의 안위를 걱정하는 진정한 리더로 부상합니다. 바울은 "나는 구원받았으니 너희는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그 배가, 그 운명 공동체가 안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아 풍랑을 만나게 되지만, 결국 그 배를 구원하는 것은 선장의 기술도 선주의 돈도 아닌, 깨어 있는 한 사람 바울의 기도와 리더십이었습니다.
2026년,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자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이 사회라는 배에 태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나 혼자 평안하게 1등석을 즐기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잘못된 방향(욕망과 편리함)으로 나아갈 때, 영적인 눈을 뜨고 깨어 있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눈앞의 이익과 편리함을 좇아 뵈닉스로 가자고 아우성칠 것입니다. 전문가의 권위와 다수의 여론이 그쪽이 옳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소리에 휩쓸리는 승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적 항해사'가 되어야 합니다.
새해의 항해를 시작하며 기도합시다. "주님, 제가 속한 이 공동체가 위기를 만날 때, 침묵하거나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바울처럼 깨어 있는 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의 가정과 일터가 나로 인해 안전하고, 나로 인해 바른 길을 찾게 하소서." 우리가 이 거룩한 책임감을 가질 때, 2026년의 항해는 어떤 풍랑 속에서도 소망의 항구로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