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사람복음3: 죽음에서 생명으로(눅7:11-17, 2016년1월17일)

사람복음3:죽음에서 생명으로(7:11-17, 2016117일 주일)

 

    예수님은 공생애 3년 중 2/3정도를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성경이 갈릴리라고 부를 때에는 갈릴리 호수를 가르킬 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호수 주변에 백 수 십 개의 조그마한 마을들이 모여 있는 비교적 넓은 지역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나인이라는, 갈릴리 지역에서도 작은 마을인데, 호수 남서쪽 예수님이 자라난 고향인 나사렛에서 5마일 거리에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2년째가 되었을 때, 예수님과 따르는 무리들은 나인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멀리서 봐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긴 행렬이었을 것입니다그만큼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점점 불어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작은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11)라고 밝힙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길이 넓지가 않아서 한 줄 또는 두 줄로, 마치 오늘날 군인들이 행군을 하듯이 길게 늘어서서 이동했을 것입니다.

 

    마을 입구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긴 행렬이 쭉 늘어서서 들어가고 있을 때, 마을 쪽에서는 예수님의 행렬 쪽으로 다가오는 또 다른 행렬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마을을 향하여 가는 행렬 맨 앞쪽에, 예수님이 앞서서 가십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마주보고 긴 행렬이 다가오고 있는데, 그 행렬의 맨 앞쪽에는 시신을 실은 상여가 있습니다. 이것을 혹 오늘날 사진사가 한 앵글 속에 담아 냈다면 굉장히 철학적인 작품이 되었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생명의 주(3:15)와 그를 따르는 긴 행렬,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생명이 끝난 한 인생과 그를 따르는 긴 행렬이 좁은 길에 서로 마주보면서 다가가고 있는 모습은,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 장소에서 일어날 이 의미 있는 만남을위해 타이밍를 맞추셨고, 의도하신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줄과 죽음의 줄이 서로 교차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얼굴은 분명히 밝고 웃음이 넘쳤을것입니다. 거기에는 병고침을 받고 새 인생을 얻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듣고 새로운 소망으로 가득찬 인생들이 예수님의 줄에 들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줄에는 슬픔과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괴롭고 힘든 사람은,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내는 상주이자 유일한 혈육인 그 어머니였을 것입니다그 어머니는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고 유일한 기쁨이 아들이었는데, 그 아들마저 가버리고 나니, 이제 이 세상에는 의지할 것도 없고, 외롭고 힘든 나날만 그녀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히 이 장례가 끝나고 나면 그 과부는 하루하루 떼거리가 없어서 구걸을 하든지다른 집에 종살이를 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도 견디기 힘든데앞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요. 그래서 그 과부는 그냥 상여를 따라가면서 울기만 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인생의 가장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는 과부에게 다가가서 하신 첫마디가 그것입니다. “울지 말라”(13). 나는 이 대목을 묵상하다가, 한참을 멈추고 이 장면이 어떤 상황인지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았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 여인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뭘까?하고 나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 말을 많이 들었을것입니다. “여보시게, 오늘은 그냥 실컷 우시게” “00이 엄마, 울어서라도 마음에 위로가 된다면, 마음껏 울어요!”사람들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 말고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것도 위로가 될 수 없고, 그 누구도 감히 남편을 떠나 보내고, 또하나 남은 아들까지 떠나 보내는 여인을 향하여서 울지 마세요!”라고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목사의 일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중에는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차마 귀로는 듣지 못할 아픈 사연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식의 백혈병이 중한데 돈이 없어서 치료도 제대로 못해주고 먼저 보낸 어머니, 평생 골목에서 구멍가게로 돈을 벌어서 아들을 의대를 보내고 막 의사가된 자녀를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 보낸 어머니, 밤에 교회에서 철야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보니 의문사한 딸을 발견한 어머니, 뇌 바이러스로 인해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한 중학생의 어머니태어난 지 사흘 만에 자식이 죽은 어머니 등 수없이 많은 분들에게, 내가 해 줄수 있는 이야기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냥 실컷 우세요. 우셔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던 한 여인에게 던진 첫마디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도 남는 의외의 말이었습니다. “울지 말라!!”

     나는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굉장히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도대체 울지 말라니?” 여기서 느껴지는 예수님의 어조는 무엇일까하고 나는 고민해 보았습니다. 뭔가 할 얘기가 있어서 부드럽게 부탁하는 어조일까요?아니면 그만 좀 울어라는 식의 호통치는어조일까요? 아니면 지금 와서 눈물 흘리면 뭐하냐?”라는 식의 자조적인 어조일까요?


    나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받은 이 대목의 느낌은, “인자함과 자신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인생의가장 슬픈 날을 맞이한 이 절망적인 여인에게, “울지 말라!!”는 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한없는 인자하심과 자신감을 동시에 보여주십니다. 어떻게요? “나는 너를더 이상 울지 않게 해 줄 수 있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진정으로 울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자만이 울지 말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자식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만이 너의 눈물을 그치게 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내가 그렇게 해 주겠다라는인자함과 자신감이죠. 이 인자하심과 자신감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집니까?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지키던 구약의 부정한 것에 대한 규례 중에, 무덤이나 시체에 손을 대면 그것은 부정한 것이었습니다(11:8). 그래서 민19:11에서는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 동안 부정하고, 3일째와 7일째에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하는 규례를 반드시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시신에 손을 대십니다. 이 당시의 이라고 번역 된 것을 오늘날의 관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흰 세마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칭칭 감아서, 갈대로 엮은 들것 위에 시신을 눕혀서 가는 상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그러니 예수님은 거의 시신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의 정결의식을 신경쓰실 필요가 없으실 뿐 아니라, 주변 시선 또한 전혀 아랑곳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신은 곧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곧장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 그랬더니 당장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15)이라고 성경은 밝힙니다. 그러고는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새번역성경에 보면, “돌려주셨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도 보면, “Jesus gave him back to his mother.”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성경은 왜 이렇게 표현할까요? 예수님이 그 사람의 생명을 다시 돌려주었다는 말입니다영혼이라는 관점으로 말하자면, 영혼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영혼을 낙원에 보내셨다가 다시 이 세상으로 돌려보내 주셨다는 말입니다. 청년의 영혼은 죽을 때, 그의 영혼은 잠시 낙원에 보내졌다가 주님이 그를 살리실 때그 낙원에 머무르던 영혼을 다시 육신으로 돌려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영혼과 육신이 재결합된 몸을 그의 어미에게 돌려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에 주님의 재림 때 육신의 부활을어렴풋이 상상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지만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교리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중간상태라고 하는 것인데요. 사실 성경에는 중간상태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다루어왔던 주제입니다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당장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천국에 갔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중간상태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주님의 재림의 날에 몸이 부활하고, 의인과 악인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후,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때그 영원한 하나님의 새왕국에서 살아갈 때까지, 사람의 영혼들은 어떤 곳에서 어떤형태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해 왔습니다. 그래서 얻은 성경적인 결론은, ‘중간상태라는 것입니다. 먼저 나는 중간상태라는 것이 어떤 천국이 아닌 어떤 완전히 다른 곳이라든가,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교리라든가 하는 오해를 갖지 말고 생각해 보자는 말씀을 드리고 시작할까 합니다.

 

    우리는 중간상태라는 말에 약간의 부정적인 생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세교회가 타락했던 핵심에 이 낱말과 관련한 비성경적 사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연옥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부패하고성직자가 타락하며, 신자들은 잘못된 신앙에 빠져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사람이 당장 죽으면 예수님의 재림때까지 도대체 어디에,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연옥설을 만들어서신자들을 현혹했습니다. 타락한 중세교회는 웅장한 교회건물을 짓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했고그 자금을 헌금으로 걷기 위해서, 연옥설을 만듭니다. 그래서 혹 가족 중 불신자로 죽었거나, 또는 믿음이 약한 가운데 죽은 가족이 있을 때,그 영혼은 재림때까지 중간상태에 머무르는데,그곳이 바로 연옥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이 땅에 살아남은 가족이 연옥에 있는 가족을 위해서 헌금을 하면, 그 헌금이 헌금함에 떨어져 땡그랑하고 소리가 나는 순간, 그 죽은 가족의 영혼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간다는 말도 안 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무지한 신자들은 그것을 믿고 수많은 돈을 갖다 바쳤고, 그 돈으로 교권을 굳건히 하고교회당을 어리어리하게 지었습니다. 그때 지었던 교회당은 이제 예배당이 아니라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어서, 후손들에게 돈을 보태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중간상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성경은 죽은 사람의 중간상태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몇 가지 단서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스올이라는 말이 적어도 60번 이상 언급됩니다. 이 낱말은 개역개정 성경에서 번역할 때 그렇게 쓰고 있고, 개역성경에는 요나에서만 스올이라는 말이 등장하고나머지는 거의 음부라는 단어로 번역되었습니다그러므로 스올과 음부는 같은 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스올이라는 말은 땅속 깊은 곳’ ‘무덤’’구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낱말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그러나 구약적인 의미에서 스올은, 육체가 죽은 후에, 이제 더 이상 이 땅과는 접촉할 수 없는 영원한 단절의 의미로 많이 쓰여졌습니다. 이곳은 천국이라든지 지옥이라든지 어떤 한 곳을 지칭하는 개념이라기 보다, 죽음 이후에 영혼이 가야 하는 총체적인 의미로 쓰여진 단어입니다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는 스올은 모든 죽은 자들이 예외 없이 집결하는 장소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오로지 기적이 아니고서는 그곳에서 되돌아 올 수 없으며, 죽은 자들의 왕국은 말하자면 빗장이 걸린 대문이 있는 하나의 도시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스올은 어떤 의인이나 악인이 가는 구체적인 장소를 언급한다기 보다도더 이상 이생의 육신의 삶과는 단절된 죽음 이후에 가야 할 곳을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신약에서도 음부라는 단어가 비슷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11:23, 10:15, “음부까지 낮아지리라라고 하면서 교만한 가버나움이 가장 낮아지게 될 것을 말하며, 16:18에서 예수님은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 못할 것이라고 교회에 약속하십니다16:23, 부자가 죽어서 음부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고통 중에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거기서 의식이 살아서 고통으로 받는 장소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신약에서 신자의 영혼과 관련하여 말하는 중간상태에 대한 묘사는, “낙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이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에서 약속하신 장면입니다. 이 낙원은 눅16장의 부자가 간 곳과 비교되는, 나사로가간 곳, “아브라함의 품과 같은 곳이라고 보여집니다사도바울은 또한 고후12:2, 4절에서, 낙원이라는 말과 세번째 하늘이라는 말을 교차하면서 사용하면서, 자신이 그곳에 갔다 왔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낙원은 신자의 영혼이 주님의 재림의 날에 부활의 영광스런 몸을 입을 때까지 머무르는 장소인 것이 확실합니다반면 불신자의 영혼은 다른 장소의 중간상태로 머뭅니다. 벧후2:9,“…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라고 한 말씀이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신자의 중간상태를 뒷받침하는 또 중요한 구절은고후5:6-8, “몸에 거할 때…. 주와 함께 거하는것을 분리해서 가르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을 중간상태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중간상태라는 것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3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1. 이것은 영혼 수면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은 적어도 14군데에서 죽은 것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당장 오늘 본문 다음 장인 눅8장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영혼이 부활 때까지 수면상태에 있어서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시간의 흐름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눅16장에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보면, 거기에서 스스로 말하고, 모든 것을 느낍니다. 심지어 부자는 자신이 너무 목이 말라서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자기의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다섯 형제들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낙원이나 반대의 형벌의 장소는 잠들어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2. 신자의 영혼은 죽음 직후 곧 바로 중간상태에 들어가지만 예수님과는 재림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단절의 상태가 지속된다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빌1:23,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또한 앞서 말씀 드린 바대로, 십자가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실 때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당일이라는 의미로, “오늘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 이후 부활하시기까지 사흘 동안, “낙원에 계셨다고 보는것이 확실합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영혼이 중간상태의 어떤 장소에 있다고 해서, 그곳이 부족하다거나, 천국이 아닐 순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굳이 낙원과 천국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곳이 중간상태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우리의 몸이 재림의 날까지는 아직 예수님의 몸과 같이 되지 않았고, 새하늘과 새땅이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이 완전히 도래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아직(not yet)”이라는 의미로서 중간상태인 것입니다그러나 이미 신자의 영혼이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측면에서는이미(already)”라는 측면에서 그곳은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마무리를 해 보면 좋겠습니다예수님께서 죽은 아들을 살려서 그 어미에게 다시 돌려 주셨다라고 하신 것은, 주님만이 생명의 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주님은 부활의 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모든 믿는 신자들이 육신적으로는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즉시 주님 품에 안기게 될 것입니다. 그곳이 낙원이라고 부르든, 천국이라고 부르든, 중간상태라고 부르든, 변하지 않는 사실은, 우리의 영혼은 의식적으로 살아서 실제로 주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과는 단절이 될지라도, 주님과는 절대로 단절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최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주님께서는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든지, 아니면 육신을 떠나 영혼만으로 살아가든지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불신자와 극명한 차이점입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도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살아가고, 죽어서도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됩니다.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는 순간 했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순간을 한번씩 맞이 하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7:59).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영혼의의식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훗날 그리스도께서 재림주로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완성되는 날에는, 우리의 중간상태에 있는 영혼과 땅속에 묻혀 있던 우리의 육신이 일어나 결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은 이전 몸이 아니라더 이상 썩지 않을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그 몸은 곳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신자는 항상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에게 예수님이 다가가셔서아들을 다시 살려주신 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게 마치 기독교 신앙은 기도하면 죽은자도 살아나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믿으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의도는 신자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고, 그러나 신자의 영혼은 주님의 재림의 날에 다시 신령한 몸으로 다시 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과부는 아들을 다시 돌려받았지만, 그것이 영원한 이 땅에서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시 슬픔을 만날 것이고, 여전히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불신자의 삶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그러나 신자가 다른 중요한 한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고백했듯이,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우리의 육신의 몸은 늙어가고 병들어 갈 수 있지만,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로와지고부활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완성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성령의 은혜안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됨으로 우리의 속사람은 늘 새로와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고두 번 더 이와 같은 일을 행하십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고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유명한 말씀이 이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 결국 복음서에 세 사람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심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는 주님의 의도는 부활소망입니다. 우리는 결국 육신이 죽지만, 또한 결국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우리가 더 이상의 이 땅에서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육신이 힘듭니다. 고됩니다. 약합니다. 병듭니다. 피곤합니다. 때론 포기하고 싶습니다. 실패합니다우리의 몸은 나날이 쇠하여지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의 실체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새롭게 하시고살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신자의 영혼은 쇠하여진 몸을 버리고온전한 그리스도의 품에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영광입니다.

    

1/18/2016 10:51: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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