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복음2:고기잡이에서 사람잡이로(눅5:1-11, 2016년1월10일)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세 군데 등장합니다: 마4장, 막1장, 눅5장. 그러나 세 군데의 이야기가 동일 사건이라고 보느냐, 다른 사건이라고 보느냐에 따라서 이 본문의 해석은 달라집니다.
어떤 학자들은 마태, 마가, 누가가 똑 같은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학자들은 마태와 마가는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사건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동일제자를 각기 다른 시간에 두 번 부르셨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4장과 막1장의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은 최초의 부르심이지만, 눅5장은 적어도 네 명의 어부 출신의, 이미 부르셨던 제자를 다시 부르는 두 번째 부르심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본문이 동일제자를 두 번째 부른 사건이라고 믿고 설교를 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눅5장이 왜 제자를 다시 부르는 장면이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마태/마가복음에 기록된 제자를 부르는 기록과 누가복음의 기록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배에 타셨는지 타시지 않았는지에 대한 차이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배에 타시지 않지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배에 타십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해변을 다니시다가/ 지나가시다가”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5:3,“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라고 나옵니다.
둘째,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보신 장면에서 제자들의 행동묘사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실 제자들을 처음 보신 장면에 대한 묘사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라고 기록하지만, 누가복음5:2,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과 어부들의 첫 대면에서, 어부들의 동작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해변가를 거닐 던 예수님이 그것을 보셨다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어부들이 배에서 내려서 그물을 씻는 장면을 봤다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어부들의 하루 일과라는 측면에서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납니다. 그물을 던지고 있다는 것은 한창 어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지만,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다는 것은 어업이 다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마태, 마가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혹자들은 그런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처음 해변을 거닐다가 어부들이 그물질 하는 것을 보셨고, 조금 기다리셨다가 육지에 내려서 그물을 씻는 어부들에게 다가가셔서 제자로 부르신 것 아니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어부의 일과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진행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에서 고기가 가장 잘 잡히는 시간은 초저녁에서 밤시간입니다. 그래서 오후 늦게 배를 띄워서 밤까지 작업을 하다가 그마저도 고기가 안 잡히면 밤새 잡아야 했습니다. 그날도 그랬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장시간 동안, 그물질이 끝날 때까지 육지에서 기다렸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죠. 또한 전날 해변가 먼발치에서 어부들을 바라보았다가, 숙소에서 잠을 청하고 아침 일찍일어나 다시 육지로 돌아온 베드로 일행을 만나기 위해서 그 다음날 다시 나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셋째, 어획고에 대한 기록의 차이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지만, 누가복음5:6에는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당시 어부들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가 많이 잡히는 경험은 흔치 않는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사람들과 얘기할 때마다 회자 되어 질 법한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특별한 날 또 다른 하나의 특별한 사건이 더해진다면 그것은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겠지요. 그렇게 물고기가 많이 잡힌 특별한 날에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 두가지 특별한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는 오랫동안 이 날을 기억할 때, 한가지 사건만 떠올려도 나머지 또 하나의 사건은 동시에 기억이 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제자로 부름을 받은날”이라는 기억이 날 때 반드시 “물고기 많이 잡힌날”…이런 식으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를 것입니다. 이처럼 네 어부에게 이 특별한 날의 기억이 있었다면, 분명히 예수님의 12제자로 동고동락하던 사이인 마태에게 수시로 이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얘기 했을 것이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기억이 곧, 마태에게는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소중한 자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날 물고기가 그 정도로 많이 잡혔다는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힌 적이 없는, 단지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해서만 마태가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크게 세가지 정도의 큰 차이를 통해서 볼 때, 누가복음은 분명히 동일제자를 다시 부르신 또 다른 부름의 사건이라고 봐 집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집에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을까요? 캠벨 몰간이라는 학자는,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가 잠시 후에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이 말이 제법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의도적으로 잠시 돌려보내야만 했습니다. 만약 그것이 주님의 의도가 아니라, 제자들이 힘들어서 집으로 돌아가버린 것이 되면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부터 "탈영병"이 생긴 꼴이 되므로, 예수님의 제자교육 사역에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어부 제자들을 부르시자 마자 얼마 안되어 집으로 돌려 보냈을까요? 그이유는 참된 헌신을 요구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참된 헌신”에 대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첫 번째 부르심”의 기록을 살펴봐야 합니다.
어부 네 명이 처음 부르심을 받던 장면을 마4장과 막1장에서 살펴보면 아주 짤막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실 때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또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는,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어부 4명은 각각 다 그들의 최고 재산목록인, 그물, 배 그리고 가족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헌신했습니다.
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아주 짤막하고 간단하게만 기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한 말 한마디에, 4명의 어부가 아주 강단 있고, 결단력 있게 헌신하고 예수님을 따른 것 처럼 묘사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독자가 이 짧은 문장을 읽으면서 받는 느낌은, 4명의 어부들이 굉장한 믿음과 헌신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처럼 느끼도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런가?”라는 질문을 해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장면의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일반적인 과정을 거치는 지에 대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세기의 제자도의 개념 중 중요한 한가지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 간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식은 그 시대 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죠. “스승이 직접 제자를 찾아가는 방법을 쓰십니다.”
먼저 그 당시 일반적인 제자도에 입문 방법을 보면, 수많은 젊은 제자후보생들이 제자로 지원하고선생이 그 지원자 중 제자로 키울 사람을 직접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1세기 유대교의 제자들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선생에게 찾아가서 자신을 선택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마치 소림사에 무술을 배우고 싶어서 찾아가는 소년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선생은 그를 받을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뛰어난 학파같은 곳 예를 들면, 힐렐학파, 샴마이학파, 또한 힐렐의 손자가 세운 가말리엘 학파 같은 곳—요즘 같으면 하버드, 예일대—에서는 구약성경을 외워서 적는 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뛰어난 자질을 갖춘 학생들은 좋은 스승을 만났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비교적 못한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리고13세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 아무리 지원해도 제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농부나 어부나 목수 같은 노동자의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1세기의 배경에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는 말은, 그들은 제자가 되고 싶어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세상 평균치에도 들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하거나, 그 이하의 평가를 받은 낙제생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어디서 제자가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날, 예수라는 사람이 지나 가다가“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다”는 굉장히 철학적인 말에 귀가 솔깃 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안돼, 나는 어느 학파에서도 제자가 될 수 없는 자격 미달이야!”라고 신세 한탄하면서, 살아가던 평범한 어부에게 예수라는 스승이 나타나서 부르는데, 그물과 배를 던져두고 따르는 것은 어찌 보면 그들에게 당연한 행동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당시의 역사가 유수한 학파의 선생이나 이름난 명문수학의 선생이 아닐지라도,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말과 병자를 낫게 하는 소문을 듣고는,저런 분이 나를 부르는데 내가 따라가지 않으면 바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어쨓든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첫 입학 시험”이 일단락 됩니다.
그리고 “입학 사정”을 끝낸 예수님은 제자들과 곧장 수업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잠시 집에 가서 머물라고 합니다.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당장 뭔가 결심하고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쫓아갔는데 예수님이 집에 돌아가 있으라고 합니다. 약간 김이 세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약간의 “숨 고르기”가 필요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고 자기점검을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내가 따라야 할 스승이 도대체 누군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1세기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자기가 따르려고 하는 스승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그 스승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수많은 것을 포기하는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 일반법칙처럼 자리잡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제자의 길은 진지 할수밖에 없었고, 많은 것을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과정이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그들은 진지한 자기고민이나 진지한 제자도에 대한 헌신이 그냥 단순히 즉흥적이었을 수 있었습니다. 첫 제자에로의 부르심에서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그동안 잡지 못했던 제자도에 입문한다는 부푼 꿈으로, 재산목록들을 다 내팽개치고 달려갔던 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진지한 제자도에 대한 헌신"이 뭔가라는 고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따라야 할 스승이 도대체 누구이며, 또한 그들 자신은 누구이며, 어떤 수준의 사람인지,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제자가 되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점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사용한 방법이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잠시 집에 돌아온 네 명의 어부가 했던 것이 뭘까요? 그냥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버려 두었던 그물과 배를 다시 만지면서, 어쩌면 제정신이 돌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래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거지, 내가 제자는 무슨….” “예수님이 다시 찾아주면 다행이고, 그러지 않아도 내가 가장 잘 하는 이 물고기나 잡으면서 평범하게 살면 되지 뭐”라고 스스로 위로했을 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업자인 어부 네 명은 여전히 갈릴리 바다로 나가서 그물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5절). 그래서 어부 네명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바닷가에서 그냥 그물을 씻고 있습니다(2절). 이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고는 배를 육지에서 약간 떼어놓고, 그 배를 강단 삼아 육지에 자기를 따르던 무리에게 말씀을 선포하십니다(3절). 그 말씀의 내용이 뭐였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말씀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복음의 진수가 담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시고는 베드로에게 명령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그때 베드로가 말하길, “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그러고는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졌습니다(6절). 그래서 동업자의 배를 불러 가까스로 그물을 올렸는데, 두 배에 물고기가 가득하여 배가 가라 앉을 정도였다(7절)고 성경은 밝힙니다. 이 일을 겪은 베드로의 행동은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9절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놀랐음이라.
여러분 흥미롭지 않습니까? 어부가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행동할까요?기뻐할 것입니다. 행복해 할 것입니다. 이 많은 물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돈을 만질 생각만 하면 가슴이 콩딱콩딱 뛸 것입니다. 나는 어릴 적 거제도에서 어부셨던 아버지를 따라 바다에 나가서 수없이 많이 고기를 잡아 보았습니다. 가끔씩 정말 그물을 끌어올리지못할 만큼 고기가 많이 잡힙니다. 그때 드는 생각은 바로 그겁니다. “와 이제 우리 부자다!” 나는 단 한번도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을 보고, 놀래 본적이 없습니다. 야구선수가 홈런 쳤다고 놀라겠습니까? 그냥 짜릿하고 기분이 좋겠지요. 마냥 기쁜 것이지요.
그런데 베드로와 동업자 어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다 놀랐다고 성경이 표현합니다. 이 놀랐다는 표현은 실제로 "두려움"에 대한 표현이죠. 그러므로 그들이 놀란 진짜 이유는 물고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놀란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릎을 꿇은 것이고, “나는 죄인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럼 왜 나를 떠나 달라고 했을까요? 자신은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예수님 같은 위대한 스승님을 따를 만한 재목이 못됩니다. 그러니 나를 떠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실 때에는 두말 하지 않고, 그냥 들뜬 마음으로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완전히 초월하시는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 앞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내가 처음에는 모르고 기분 좋아서 제자가 되려고 따랐지만,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이고, 나는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로,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인생이 주님을 진정으로 대면하게 되면, 처음 드는 느낌은 기쁨보다 먼저 두려움이죠. "아! 나는 죄인이구나, 나 같은 인생은 주님 앞에서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죠. 그리고 회개가 나오고, 그런 다음에서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베드로의 행동은 주님을 만난 감격이 찾아오기 바로 직전 단계인, "두려움"이죠. 그리고 "회개"가 나오며, 그 다음에는 "기쁨"이 찾아 오는 것이죠.
우리 기독교 신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일반 세상의 제자도와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의 제자도는 자신을 인정받는 자리에까지 올라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자신도 또한 자신이 가르쳤던 스승의 자리 또는 그 이상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1세기 제자도는 그랬습니다. 처음 제자로 수락되어서 입교하게 되면, 초보때는 방 맨 뒤쪽에 앉아서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으면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발표도 합니다. 그러다가 다음 단계는 조교가 됩니다. 그러면 조교는 랍비 바로 뒤에 앉습니다. 그러다가 최고의 단계인 현자의 제자 단계에 이르면, 스승인 랍비와 동등한 수준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또 다른 스승이 탄생하는 것이지요.이제 더 이상 제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습니다.더 이상 스승의 학식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독자적인 랍비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들의 최고의 목표는 결국 “스승으로부터 독립”입니다. 이것이 1세기 제자도이며,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제자의 목표지점이 결국 스승의 자리인 셈이지요.
그러나 기독교 신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이 되어 독립해 나가서 또 다른 스승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닙니다. 기독교 제자도는 ‘독립’이 아니라 ‘의존’입니다. 기독교의 제자도는 “한번 제자는 영원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라서 예수님이 필요 없게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 예수님을 의존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5:5,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제자도의 핵심은, 믿음이 자라면 예수님을 떠나 독립적인 랍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예수님만 바라보도록하고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되는 “예수 의존형 인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제자도입니다. 신자는 성령충만 하면 할수록 더 이상 성령충만이 필요없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성령충만이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거룩해지면 질수록 더 이상 죄에 대해 자유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죄에 대해서 주님이 붙드시지 않으면, 자유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기독교 제자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믿을수록 예수님의 가르침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많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도록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제자도의 역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매일매일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매일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 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