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복음1: 서론(눅1:1-4, 2016년1월3일 주일)
오늘부터 3개월간 누가복음 강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서론입니다. 오늘날 어떤 책을 출판할 때, 저자가 책의 내용을 다 완성하고, 맨 마지막에 하는 작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책의 ‘서문’을 쓰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 맨 처음 나오는 부분이지만, 누가가 분명히 맨 나중에 쓴 서문으로 봐 집니다. 그렇게 봐 지는 이유는, 3절,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라는 말이 이미 완료형으로 쓰여졌고 이것은 이미 누가복음이 다 기록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누가복음을 누가가 썼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실 누가복음에 어디에도 누가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누가복음이 누가가 기록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지난 1900년 넘게 이견이 없었던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복음도 기록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일저자가 누가복음을 먼저 기록하고, 그 다음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저자를 밝히면 자연스럽게 누가복음의 저자도 밝혀지는 것입니다. 행1:1을 보면 “데오빌로여”라고 나오는 대목이 있는데, 이 이름은 성경에 딱 두군데만 이 이름이 등장합니다. 행1:1과 눅1:3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은 동일저자가 확실합니다. 게다가 행1:1에 “데오빌로여” 다음 따라 나오는, “내가 먼저 쓴 글에는”이라고 데오빌로에게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그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이 확실해 집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복음의 저자의 후보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자동으로 탈락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과 선교여행에 동참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행전은 바울과 가까이서 선교여행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기록할 수 없는 자세한 복음전파의 현장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행18:18절, 사도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는 기록은, 풍문으로 전해 듣고서는 그런 상세한 기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 현장 그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가까이서 함께 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사도행전의 저자가 될 것이고, 또한 누가복음의 저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 3절에서 저자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다 자세히 살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가까이서 예수님을 겪었거나, 그 내용들을 상세히 알고 있는 목격자들과 일군들의 증언들과 자료들을 수집하는 작업을 했고, 또한 그것을 잘 정리하고 분석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전도여행을 상세하게 기록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바울과 동행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스토리를 상세하게 경험했거나 가르치고 있는 사람의 곁에 늘 머문 사람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둘째, 사도행전에는 바울과 동행했던 인물들의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바나바, 디모데, 마가, 아리스다고, 실라…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의 저자는 적어도 이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제3자처럼 잘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우리”라는 표현을 적어도 36번 정도 쓰면서 ‘저자 자신’이 바울과 선교여행을 함께 했음을 다섯 군데에서 기록합니다. 행16:10-17, 20:5-15, 21:1-18, 27:1-28:16.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저자는 열두제자의 이름에도 등장하지 않고, 사도행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면서, 바울과 항상 같이 있었던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누가라고 보는 것입니다.
셋째, 결정적으로 유력한 이름들 중에 사도행전에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바울의 곁을 끝까지 지키면서, 바울의 모든 복음의 진수와 예수님의 생애를 거의 바울만큼이나 지식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 누굴까?라고 질문 했을 때, 답을 던져주는 성경구절이 있는데, 딤후4:11입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사도 바울이 생애 마지막으로 로마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끝까지 그와 함께 한 사람은 누가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의 2차,3차 전도여행과 4차 로마행 배와 로마에서의 재판과정을 다 곁에서 지켜 본 사람은, 누가 밖에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누가만 이 사도행전을 실감나게 기록할 수 있었으며, 또한 사도 바울의 모든 예수님에 대한 생애와 가르침을 전수받고,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넷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보면, 다른 성경에는 없는 의학용어가 많이 등장하고, 환자에 대한 설명이 굉장히 상세하고 전문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2절, “목격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우토프타이(αὐτόπται)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 autopsy, 시체부검, 해부라는 뜻의 단어가 나옵니다. 본래 이 단어는 조사하다, 살피다라는 뜻인데, “목격자”라는 헬라어 단어와 같은 뜻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또한 2절에 이어서 “일군된 자”라는 말 또한 헬라어로 “우레페타이(ὑπηρέται)”인데, 이것은 본래 assistant를 뜻합니다. 이 단어가당시 의사의 시중을 드는 보조의사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이렇듯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의술 용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저자는 의사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골4:14에서 바울은 누가를 의사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은 누가가 누가복음을 적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4가지 정도의 증거들이 누가가 누가복음을 적었을 것이라고 지난 1900년 이상 흔들림 없이 “누가 저작설”이 인정받아 온 이유들입니다.
이제 누가복음의 수신자가 누구냐 하는 것인데, 3절에 ‘데오빌로’라고 나옵니다. 우리는 데오빌로가 누군지 알만한 증거가 거의 없습니다. 데오빌로라는 뜻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하나님의 친구”이라는 이유로 혹자들은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특정인물이 아니라, 신자 모든 사람을 가르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 “각하에게”라는 말을 적은 것으로 봐서, 1차 수신자는 로마 사회의 상류층의 사람일 것으로 봐집니다. 그리고 2차 수신자는 이방인들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모든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이 글을 적은 이유가 뭘까요? 4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한 대목이 정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가 듣고 배운 신앙의 기초는 있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을 더 견고케 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도 배우고 들은 바를 더 확신하게 하는데, 누가복음이 필요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누가복음이 다른 어떤 성경보다 독특하고 대단하다고 할만한 점은, 저자인 누가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성경을 기록한 유일한 이방인 저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방인인 누가가 또 다른 이방인인 데오빌로에게 신앙의 확신을 위해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냥 쉽게 생각하고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교회사적으로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칫 성경이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국가에 국한 되어져서, 특정한 한 민족의 역사기록물이 아니냐라고 하는 비판적인 시선을 무력화시킵니다. 이방인도 성경의 기록자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하나님은 성경의 가르침이 중동에 한 민족에 국한된 기록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그 이방인 저자가 쓴 성경의 내용을 받아 볼 첫 번째 독자가 또 다른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성경은 전 세계 모두에게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절대 한 나라의 민족종교가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밝혀놓은 약속의 책인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4절에서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을 밝히면서 사용한 단어 “그 배운 바”를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단어 ‘카테케스(κατηχήθης)’인데, 이 말은 “입으로 가르치고 배운다”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to teach orally, to inform by word of mouth, to be orally informed”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단어 ‘Catechism’이 탄생합니다. 뜻은 “교리문답”입니다. 우리가 금요일 밤마다 하고 있는 것은 소교리문답(Shorter Catechism)이라고 부르는데, 이 교리문답이라는 말 자체가 싣고 있는 뜻은, "묻고 답한다”라는 것이죠.
데오빌로는 누가복음을 받기 전까지는 신앙의 가르침을 ‘구전교육’이라는 방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로 묻고 답하거나, 아니면 스토리텔링 방식을 통한 내러티브(narrative as a teaching)교육 방식을 통해서 복음을 전수 받았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짜임새 있고, 조직적으로 상세하게 요약된 복음을 전수받았을 리가없습니다.
혹 구전교육, “카테케스”라고 해서,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같은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 금요일마다 배우는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은 16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만들어집니다. 데오빌로 시대에는 문서화 된 교리문답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운 복음의 내용을 다시 들춰 볼수 있는 자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어느 시점에 가면 흔들리고,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다가 이단자의 가르침을 접하게 되면, 쉽게 넘어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9차례에 걸쳐서 살펴보았던, 갈라디아서도 결국 그런 배경에서 기록되어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개척해서 교회를 세워놓고, 다른 곳에 있는 동안,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단자들의 가르침에 쉽게 자신의 믿음을 내어주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한번 더 기록물을 통해서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자 갈라디아서라는 편지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도 그런 측면에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심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언어와 글자라는 매개체로 구체화 되어지고, 현실화 되어진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기록되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직접계시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직접계시를 듣는 한 시대에 특정한 몇 명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신자는 항상 선지자가 외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찾아 다녀야 하거나, 그러지 못할 경우 선지자가 찾아와서 외칠 때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멀리 있는 것이 되고, 선지자들의 전유물이 되어서, 오늘날과 같은 개인적인 묵상을 통한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구전교육”을 통해서 복음을 배우는 시대가 아닌, 이제 개인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이 얼마나 말씀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인지 신자는 실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데오빌로의 시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전히 “구전교육”에 “목”을 맵니다. 몇몇 말씀을 잘 전하고, 신통방통하고 명쾌함을주는 설교자가 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이 시대가 들을만한 설교자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냥 “들려주는” 괜찮은 소리에 “귀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신앙의 기쁨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잘 준비된 설교 한 마디에 열광하고, 그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만지심을 받았다는 착각에 빠져 신앙생활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그냥 앉아서 귀로 듣는 구전 교육”이 마치 성경을 깨닫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저는“신 데오빌로 증후군”(New Theophilus Syndrome)이라고 부릅니다. 그냥 개인 묵상이나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통하지 않고, 그저 구두로 남이 전해 주는 것을 듣고, 알기는 알지만 머릿속에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늘 “흔들리는 신자”를 가르켜서 저는 개인적으로 “신 데오빌로증후군 신자”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을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제가 지은 신조어입니다. 오늘날 그런 신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저 귀로 듣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안이함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물로 주신 이유는, 개인이 스스로 읽고 그 성경의 능력이 개인속에서 발휘되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신자들이 갖는 오해가 그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읽어도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가 안 간다. 고로 나는 읽지 않고 듣는다.” 이것은 굉장히 무지한 발상이며, 성경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성경이 이해되지 않아도, 또는 성경에 대한 신학적 지식이나 배경 지식이 없어도 성경이 독자에게 들어와서 그것 자체가 힘이 되는 이유는 말씀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성경을 대할 때, 성경을 분석적으로 다 알아서 그것이 신자에게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의 성분이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하고 먹어도 그것이 몸의 에너지원이 되고 영양분이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아무도 음식의 성분을 분석해서, 그것이 이해되어질 때까지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도 마치 음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히5:12은 바로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해 설명하면서,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음식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단단한 음식은 먹어본 사람이 계속 먹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젖만 먹고 먹기 싫어하면 단단한음식을 못 먹습니다. 그런데,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의 성분을 알았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이 살아 있기 때문에 먹는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몸 속에 들어가서 힘이 나게 하고, 살아서 몸의 힘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그와도 같은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6에서 뭐라고 가르칩니까? 이 구절은 소교리문답 제2문, 다음주간의 “암송구절”이 되겠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쉽게 넘기시면 안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은, “떼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라는 단어인데,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하나님의 영감이 불어 넣어진”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살아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뭐라고 되어 있나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살아 있는 것 만이 교훈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책망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 만이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이 교육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제일 못난 신자는 성경이 그냥 흰 종이 위에 씌여진 죽어있는 활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는 이미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바르지 않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기가 힘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성경이 활자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간혹 설교자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지금보다 형편없던 설교자 시절에는 그럴 때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설교단에한번 서기 위해서 쏟아 붓는 시간은 다를 바 없습니다. 수많은 시간을 들이고 책을 읽고, 성경 묵상과 연구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자체 힘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외에 것을 너무 많이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이와 같은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저 활자에 지나지 않고,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할 때 절대 잊지 말아야할 한가지 사실은, “기록된 말씀은 활자가 아니라, 살아 있고 능력있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서는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라고 할 때, “말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 로고스(λόγος)입니다. 이 로고스는 사도 요한이 가장 많이 쓴 단어인데, 요1:1에서 3번이나 반복해서 쓰면서, 결국 “로고스,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요1:14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표현하면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말씀이신 하나님 본체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성경을 살아 있는 하나님 자신, 살아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우리 삶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는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자(사람)이시다”라는 명제입니다. 말씀이 살아 역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실체가 되셔서 역사하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2000년전에 죽고 없는 “한 성인”을 따르고 신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실체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 실체를 붙드는 행위가 바로 성경을 읽고, 그것을 묵상하고, 또한 그 말씀이 나의 삶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이 강조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인자로 이 땅에 오셨다”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신학자들이 별명을 지었는데, “사람복음”이라고 지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그 사람은 말씀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심령을 깨우치고 소생시키시며, 살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5:45에서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지칭했고, 그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마28:20에 예수님의 유언을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을수 있나요? 그것은 “말씀”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말씀만이 변함이 없고, 말씀만이 우리와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안에서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의 영혼의 상태나, 성경을 많이 알고 모르고의 정도나, 학력의 길고 짧음에 전혀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의 상태와는 별개로 활동하십니다.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성경을 혼자 묵상하고, 그 묵상의 방법 중 한가지인 큐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묵상 방법중의 하나인 성경암송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지 모릅니다. “성경암송 같은 구시대적인 방법으로 무슨 능력이 있을까?” 또는 “성경해석도 할 줄 모르는데, 혼자 큐티하면 무슨 능력이 있을까?” 이런 생각은 좀 무겁게 표현하자면, “불경죄”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스스로 비하해 버리는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엡6:17에서는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공격용 무기인 성령의 검, 성경말씀이 나에게 훈련되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으면, 항상 마귀에게 지고, 실패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의 삶은 매일매일이 비참한 삶으로 전락하고,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풍성한 삶(요10:10)은 한 순간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신 데오빌로 증후군”에서 벗어납시다. 말씀의 목격자와 일군으로 일어서기 위해서, 올 한 해에는 아침마다 말씀묵상과 성경암송으로 하루를 엽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말씀이 되어 우리가운데서 능력 있게 역사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