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주중 인사를 위한 묵상 (4/26) - 사도행전 9:1-19
사도행전 9:1-19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5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7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9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12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17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18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 주중 묵상 | 사도행전 9:1–19
“신율(神律)의 삶, 부활의 길에서 다시 태어나다”
사울은 여전히 위협과 살기를 띠고 다마스쿠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잡기 위한 계획은 대제사장의 친서까지 동반한 무거운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집힙니다.

강한 빛 앞에 땅에 엎드러진 사울은 시력을 잃고,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갑니다.
그는 사흘 동안 보지 못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깊은 침묵과 기도 속에 머뭅니다.
그 시간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 속에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나니아가 등장합니다.
사울의 악명을 알았기에 그에게 나아가기를 주저했지만,
주님의 말씀 앞에 그는 용기를 내어 사울을 찾아갑니다.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라고 부르며, 믿음의 공동체로 그를 초대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 사울은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세례를 받고 다시 일어섭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 안으로 들어온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강하게 개입하셔서 역사의 방향을 돌이키십니다.
사울은 자율(自律)의 인생을 따라 살고 있었지만,
그 만남 이후로는 신율(神律),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인생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신율의 삶은 단지 은혜의 선물만은 아닙니다.
그 삶에도 ‘응답’이 필요하고, 그 응답에는 ‘노력’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으며,
날마다 말씀과 기도 안에서 새로 태어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절만이 아니라 그 다음 일주일 또한 깊은 의미의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교우들은 부활의 기쁨 안에서 매일 모여
성찬의 의미와 말씀의 은혜를 더 깊이 되새기며 믿음의 삶을 다졌습니다.
부활절 둘째 주일은 ‘우리가 새로 태어나는 주일’이라는 뜻으로
콰지모도 주일(Quasimodogeniti) 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살리셨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초대교회처럼, 이 부활의 시간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훈련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 신율의 삶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 봅니다.
사울처럼, 도마처럼, 우리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부활의 길 위에 서는 첫 걸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당신의 뜻에 순종하며 부활의 삶을 살게 하소서.”

4/26/2025 4:57: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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