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눔
에스겔서 4장 1-17절
<질그릇 성도들과 나누는 묵상>

2019년 7월 17일(에스겔서 4장 1-17절)_새번역

1 “너 사람아, 너는 이제 흙벽돌을 한 장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새겨라. 2 그 다음에 그 성읍에 포위망을 쳐라. 그 성읍을 공격하는 높은 사다리를 세우고, 흙 언덕을 쌓고, 진을 치고, 성벽을 부수는 무기를 성 둘레에 설치하여라. 3너는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그 성읍 사이에 철벽을 세워라. 그 도성을 포위하고 지켜보아라. 네가 그 도성을 포위하고 있거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 주는 징조다. 4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네 몸에 지고 있거라. 옆으로 누워 있는 날 수만큼, 너는 그들의 죄악을 떠맡아라. 5 나는 그들이 범죄한 햇수대로 네 날 수를 정하였다. 그러니 네가 삼백구십 일 동안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떠맡아야 할 것이다. 6 이 기간을 다 채운 다음에는, 네가 다시 오른쪽으로 누워서, 유다 족속의 죄악을 사십 일 동안 떠맡고 있거라. 나는 너에게 일 년을 하루씩 계산하여 주었다. 7너는 이제 예루살렘의 포위망을 응시하면서, 네 팔을 걷어붙이고, 그 성읍을 심판하는 예언을 하여라. 8 내가 너를 줄로 묶어서, 네가 갇혀 있는 기한이 다 찰 때까지, 네가 몸을 이쪽 저쪽으로 돌려 눕지 못하도록 하겠다. 9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준비하여 한 그릇에 담고,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누워 있는 삼백구십 일 동안 내내 먹어라. 10 너는 음식을 하루에 이십 세겔씩 달아서, 시간을 정해 놓고 먹어라. 11 물도 되어서 하루에 육분의 일 힌씩, 시간을 정해 놓고 따라 마셔라. 12 너는 그것을 보리빵처럼 구워서 먹되,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인분으로 불을 피워서 빵을 구워라.” 13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다른 민족들 속으로 내쫓으면, 그들이 거기에서 이와 같이 더러운 빵을 먹을 것이다.” 14그래서 내가 아뢰었다. “주 하나님, 저는 이제까지 저 자신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절로 죽거나 물려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은 적이 없고, 부정한 고기를 제 입에 넣은 적도 없습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좋다! 그렇다면, 인분 대신에 쇠똥을 쓰도록 허락해 준다. 너는 쇠똥으로 불을 피워 빵을 구워라.” 16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의지하는 빵을 끊어 버리겠다. 그들이 빵을 달아서 걱정에 싸인 채 먹고, 물을 되어서 벌벌 떨며 마실 것이다. 17 그들은 빵과 물이 부족하여 누구나 절망에 빠질 것이며, 마침내 자기들의 죄악 속에서 말라 죽을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행위 예언을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게 하시고 알리십니다.

“ 8 내가 너를 줄로 묶어서, 네가 갇혀 있는 기한이 다 찰 때까지, 네가 몸을 이쪽 저쪽으로 돌려 눕지 못하도록 하겠다.”
고통입니다. 고통의 연속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패망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도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퍼포먼스로 예언하는 것 역시 심적 고통이 컸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도 당합니다. 과연 이러한 행위 예언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의미를 있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에스겔은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메시지로서, 말씀 그 자체로서,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33년여간 사셨습니다.

그가 행하신 삶, 가르침, 말씀, 기적, 그 가운데 겪어야 했던 그를 오해하고 반대했던 수많은 고통을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삶에서 예수님처럼,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서 사명을 승계한다고 조직신학적 교리는 가르쳐 줍니다.

나도 나의 삶을 통해 비록 고통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성도의 삶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남유다 백성의 죄악은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무력화 시킨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에스겔을 통해서라로 말씀하셔야 하는 하나님은 그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의 실존과 주권적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돌이키게 하시기 위한 사랑이 출발점임을 문득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나를 다스리십니다. 죄악은 깊어가고 절망은 커져 가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7/17/2019 2:35: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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