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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i Kim
잃어버린 감사와 고장난 안테나

잃어버린 감사와 고장난 안테나

계절의 확실한 경계가 없는 캘리포니아에 오래 살다 보면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도 흐려지는 같다.  우리눈에 보이는 경치가 항상 비슷해서 봄인지 여름인지 구분이 가지 않고  또한 가을인지 겨울 인지도 구별이 가지 않아  일년이 매일 날이 같아 단조롭기 조차 하고 거기에 무언가 바쁜 인생을 살다보니 느낄수 있는 안테나가 고장났는지 조차 알지 못하며 달려왔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씨와  좋은 환경인 캘리포니아에 살지만 별로 감사하는 마음도 없이 살아왔다.

영적으로도  어린 나이에  일찍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주어진 모든 은혜들이  마치 우리가 당연히 누리는  권리인양 누리기만 했지 별로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온 같다.  작년 5 김영순 권사가 건강에 문제가 있어 병원에서 철분 주사를 맞기 시작했는데  한달 위암  3 라는 진단 내려질 까지 우리에게  이렇게 파도가 밀려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우리가 한국에 한국은 경제적, 문화적으로  뒤져 있어 눈으로 미국은 우리 에게는 꿈의 나라 였고  멋진 드레스와  일도 조금 씩만 해도 모두가 잘사는 그런 나라로 오해 했는데  40 여년전에 와보니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곱게자라 대학을 졸업하고 나에게 시집와서 40년을 같이지낸 받은 훈장은 위암 3 기였다.

지난 8-9개월 동안  키모와 레디에이션 치료는 연약한 김권사에게는 감당하기 힘들었고 부작용도 많아 어떻게 시간을 지냈는지 기억속에 암울하게 남아있다. 어쩌면 치료에서 오는 길고  많은 고통들 보다  마음의 병이 생겨 자신을 잃거나 우울증이라는 올무의 그늘에  있을 있었지만  여러 성도님 들이 견딜 있도록  많은 기도와  격려 또한  암에 좋다는 많은정보을 주어 조금씩 위안이 되었다.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힘을 주셨고 인도해 주셨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 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 하리라 너를 긍휼이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54:10)’   얼마나 위로가  되는 약속인지 모릅니다.

많이 늦었지만 우리는 이제사  심각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고 이제라도 작은 일에도 감사를 하기로 했다. 우리가 매일 숨쉬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것 조차 신기하고 감사를 한다.  서로 다른 가정, 환경에서 살다가 성장하여 만나 결혼하는것은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아닌가.  모든사람들이 얼굴이 다르듯이 각자의 결혼 생활의 모습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글을 읽고 동감해서 도움이 된다면  다행 이라고  생각하고   겸언적이긴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나의 결혼 생활을 되돌아본다.

* 나의 처음 10년은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위해 언어, 풍습,각자 학교 때문에 크게  다툴 시간없이 서로 바쁘게 지냈고 미국에서의 처음직장  그리고 우리가정에 주신 아들을 통해 기쁨과 열심이 있는 시간이었다.  영적으로는 안수집사 직분을 받고  교회에 열심을 내었고 열심히 하는것은 좋은 일이나 조금씩  바리새인이 되어가는 느낌을 떨칠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갖고있는 성격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전공을 건축을 하고 미술을 전공처럼 해서 모든일에 완전 해야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용납이 안되는 그런 성격이었다.  회사에서도 윗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은 괴로워 하면서도 신입이오면 용납을 못해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술을 하다보면 자신이 크리에이티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기만의 작은 세계가 있다.  자신의 상상의 세계속에서  갇혀 시간을 보내고  집중을 하다 보면  옆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중요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이 가능성이 있다.  내주변에는 미술전공한 여친들이 몇있다.  나와는 여러모로 통하고 만나면 어떻게 시간가는지 모르게 지낸다 .  그러나 대부분 개인 결혼에서는 실패하고 이제 홀로 지낸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기주의자는절대 아니고  멋을 안다.  추구하는 개념이 다르고 자존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두번째  10년은 미국 생활이 조금 안정되어 내집도 마련하고 직장도 그런대로 안정되었고  아들도 고등학생이 되어 건강하게  학교와 교회생활을  좋은 기간이었다. 아들 유진이 고등학교시절 학교 공부 보다는 건강히 자라고 운동을 열심히 하여 아들이 성인이되어 힘든 세상에 홀로 헤엄 치기를 기대하면서 협동심과 승부에 강한 아들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인지 농구와 배구에 발시티팀에서 열심히 힘든 고등학교 기간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낼수 있었다. 영적으로는 계속 열심을 내었고 장로 직분을 받고 교회봉사와  성경공부에 많은 시간을 있던 시간들이었다.

*세번째 10년은 미국에 대략 10년마다오는 불경기가 나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에도 불경기가 있었고  1990년이되면서 불경기가소리없이 슬슬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할   당시 한국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회사에 디자인 스탭이  혼자인 관계로   일이 2페이지나 되어(거의 일년분)  샌디애고에 있는 디자이너를 임시로 오게하고 무척 미안한 마음으로  2주간 한국방문을 마치고 오니 많던 일들이 연기되거나 취소되어 부터 일이 없이 6개월을 지나고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장사를 돈을 벌어 선교 헌금도 잘해 보자는 마음을 갖고 작은 사진가게를 시작했다.  리테일에 전혀 무뢰한 사람이 ( 물론 비지니스 플랜 했지만) 가게를 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격이 다른  많은 손님들을 만족 시켜야 하고 사진의 질도 높혀야 하고 복잡한 기계들도 관리하는 일은 열심히 하니 그런대로  해결되는데  높은 렌트비를 내고 이익을 남겨야 하는일은  내게 무척 힘들고 넘기 힘든 부분이었다.

회계학을 공부한  탓에 하루종일 회사에서 시달린 저녁에   되지않은 가게에 와서 시중하고 늦게 집에가면 식구들 저녁을 준비해야 하는 힘든 시간들이 김권사의 속을  골병들게 했지만  눈치 채지 못하고  8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건물주와  10년이란 기간을 계약했으니 처음 하는 주제에 얼마나 무식하게  도전했는지 모른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나 할까   시간이 어떻게 보면 나에게  제일 괴로운 시간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당시 아들 유진이 대학을 가기 위해 뉴욕 으로  떠나고 우리가정은 경제적으로  너무 많은 빚을지고(렌트비가 당시 $3,500.00/) 모든 것을 감당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처음으로 자살 이란걸 생각했다.  매일 밀려 오는 압박감 그리고  내야하는 많은 청구서, 그리고 해는 얼마나  비가 많이 내리는지 하루에 손님 한명도 오지않는 긴하루가  많이 있었던걸로 기억한다.  이렇게 나의 3번째 10년은 깊은 골로 빠져 갔다.

당시 나를 헌신적으로 도와주던 고마운 한국 학생이 있었는데 굳은일도 자신의 일처럼 해주었고 시간나는대로 나는 학생에게 성경을 조금씩 가르켜주고  대신 나에게는 음악기초를 설명해주는 아름다운 순간들도 같이했다.  후에  버클리를 졸업하고 캔사스에서 음악 교육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건강히 지내기를 항상기도한다. 젊은 이여학생이  어떻게 느꼈는지 차사고로 가장해서 자살할것 같다고 하며 절대 그렇게 하시면 않되세요 하던 생각이 함께 떠오른다.  당시 살던 집을 정리하고 밀린 렌트비를 내고 건물주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2년계약이 남았지만 벌금없이 계약해제를 해주었다.   센터는 마켓과   약국이 있고  중간에  10개의 작은가게들이 있는데  8년동안 통상 27개의 가게들이 오픈했다가 문닫고 나가는 기간이었다.  부모님집으로 이사해 들어가 살며 섬기던 교회는 건축을 하게되어 힘닫는대로  참여하는   기쁜 시간도 있었다.   세번째 기간이 제일  괴로웠던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가게를 운영는 사람들의 고초와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알게 했고 부부의 사이에서 냉냉한 전선이 흐를  때의 고독감을 경험하는 귀한 시간들 이었다.

*네번째 10년은 나의 망가진 경험에서 탈피하는 시간이었다  (후에 느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단련을시켜주신 기간) .  가게를 그냥 문닫을때  8년동안 정들었던  많은 단골 손님들이 섭섭해 하고 꽃도주고 와서 포옹도 주며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나이50중반이 넘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막막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할수 있는것을 하는게  나을 같아 먼지가 덮인 포트 리오(작품집) 찾아  2곳에 이력서을 보내었는데  몇일 인터뷰 연락이 왔다.  처음 인터뷰 한곳은 샌디애고 였는데  도착하자 자기들 작품을 보여주며 전에  있던 회사의 상사  이야기를 하며 동창이라며 전화통화 했는데  벌써 인터뷰 하기 채용하기로 했다며 기분 좋게 이야기 나누며 형식적 인터뷰를 하고  오퍼를 써주었고  내일 얼바인에  인터뷰가 있어 후에 결정해도 좋다는 양해를 받고 그곳을 떠났다.

다음날  얼바인에 있는 사무실에서도 인터뷰하고 오퍼 편지를 주었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직장 에서 줄수 있는혜택과 월급이  1달러도 틀리지 않고 같다니!  여러모로 고민을 했다 샌디애고는 멀지만 차안에서 설교를 듣고  나만의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 유익하고 얼바인은 그런시간을 갖지 못하지만  건축일이 자주 늦게까지  있어야하는데  그런면에  좋은 점이  있어 얼바인에 있는 회사로 정하고  5년이 지날 무렵  목통증이 있던 나에게 팔이 끊어지는 아픔과 함께 숨쉬기가 힘든 고통이 왔다. 얼마후 ( 30분정도) 통증과 호흡곤란 증세는 사라져  다음날 회사에 가서 병을 달고 다니는 나이든 직원이 있었는데 그에게  물으니 적은 심장마비 같다고  빨리 병원에 보라고했다.

 병원에 가니 당장 심장 전문의에게 보내지고 검사하고 급히 수술실 보내져 8시간의 심장 오픈 수술을하고  3 바이패스를 한후 2일동안 회복이 되지않고 죽음의 사선을 헤매다 깨어 났지만 오랫동안 휴우증과 가슴통증으로 병원을 오고가며  7-8개월이 지나고  후에  회사에  반나절 하는 것으로 하고 회사를 다니니   자신 별로 일의 성과가 없고 회사에서도 무척 힘들어 하는것이 느껴져 회사를 사임하고 당분간 집에서 쉬고 새로운 회사 근무하며 조금씩 건강도 회복 되어 갔다.  

기간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지 경험하는 시간 이었다.  심장 수술을 하고 집에서 쉬고 있을  19 가까이 근무하던 김권사  회사가  파산 하며 갑자기 문을 닫게되어 같이 실직자가 되어 나의 병간호를 해주어 회복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줄타기하는 심정이 었지만  일년 김권사는 새로운 직장을 찿게되고  나의 건강도 회복되고 같이 새직장을 갖게 되는 은혜도 누리게 되었다.  심장에 문제를 갖고 일하니 항상  통증 있어 김권사의 권유를 따라  63세에 은퇴를 하고 그리도 하고 싶던 그림에  몰두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림이 쉬운것으로 생각해 누워 떡먹기 정도 생각하지만 보니 그리 쉬운것은 아닌듯 하다.  항상  남이 하는것은 쉽고 내가하는 일은 무척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남이 힘들어 하고 어려워 하면 같은 마음을 품을 있고  슬퍼하고 같이 기뻐할  수도 있다.   40년을 부부로 같이 살아오며 배운것은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사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말씀을 이해하고  그렇게 하려고 애쓴다.  또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말씀을 젊어서 정말 가슴으로 이해 했다면 얼마나 더유익하고 서로에게 행복하고  복된 삶이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지난225 목요일 키모를 8시간 가까이 받고  기진맥진 집에온 김영순 권사는  이제  너무 힘들다고 하며 지친다고  이야기를 했다. 일주일간 먹는 키모약을 복용해야 하고  일주일   3 17 팻스캔을 해서 네가티브가 나오면 키모가 끝난다는 의사의 진단이2 29 월요일에  있었다.  담당의사 선생님은 독일에서 공부한 분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보편적으로 병원혜택을 주지만 미국 처럼 비싼 좋은 약은 보장 되지않는다며  미국이기에  3기가 치료되었다는 이야기를 주셨다.  그러나 대신 미국에서는 죽을 까지 일해야 한다고 하며 잔인하다고  말을 마치셨다. 정말 시간이 지날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미국의 생활이다.  그러나 언제나  어려운 때와  힘든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도에 열심히 동참해 우리 질그릇 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생각하고  하나님  때에 이렇게 좋은 응답을 해주셔서 우리는 힘들지만 감사의 기도를 드릴수 있다.  그동안 희미하게만 보였던  봄이 어느새 우리 곁에서 아름다운 모습과 색의 향연으로 다가와  있다.  우리가 느낄 때에 봄은 나의 교향악이 될것이다.  그동안 고장났던 안테나와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게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올려드린다.     

아래 꽃들은 우리에게 주시는 봄의선물이며 교향악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내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  다시 감사하며 아름다운 꽃들을 여러분께 드립니다  ( 사진은 포토앨범에  올렸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내고  용기와 믿음으로  나가기를 기도 합니다

아 멘!                                                                                                

                                                                                                                                                                                 김재현 장로     

 

 

 



3/2/2016 10:37:00 AM

1 개인 의견이...
1.
은혜로운 장로님의 간증에 눈물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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