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할 것과 분리 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지혜
나는 칼빈주의자입니다. 나는 예정과 선택을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들을 필수적인 주제로 두기를 바라진 않습니다. 나는 이것들을 비필수적인 주제에 두려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어떻게 이 위대한 구원이 당신에게 왔는지 당신의 정확한 이해를 통해 받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반드시 확실해져야 할까요?
당신은 상실 되었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었으며, 아무런 소망이 없고, 아무런 도움이 없었으며 은혜의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그 분께서 못 박히시고, 당신의 죄들을 위하여 징계를 견디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시고, 거듭나게 하신 것 이것들이 바로 핵심 들입니다.
제 자신이 이 주제에 매우 확고하고 강력한 견해를 붙잡는 동안에는 나는 예정과 선택의 교리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과 분리되길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예정과 선택을 믿을 수 없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오랫동안 나에게 말했습니다. 칼빈주의자들도 동의하다시피, 우리 모두는 은혜의 의해 구원 받았고, 하나님은 어디에서든 회개하는 자는 모든 사람을 부르신다.
칼빈주의자나 알미니안주의자 모두 이 사실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한, 나는 우리는 교제를 끊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나는 예정과 선택은 비필수적인 주제로 놓으려 합니다. < Reference: What is an Evangelical?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2, p. 87-88.(무엇이 복음적인가? 베너 오브 트루쓰, 1992, p.87-88) Author:Martyn Lloyd-Jones(저자: 마틴 로이드 존스).>
설교자로 유명할 뿐 아니라 큰 영향력을 나눈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글입니다. 아마 제가 이런 말을 했다면 문제가 발생했을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자는 신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신학함에 대한 고뇌가 없을 수 없습니다. 위 진술은 그의 고뇌 속에서 진술로 받아들입니다.
아는 것이 믿는 것이라 생각했던 젊은 날이 있었습니다. 자연히 믿는 것, 아는 것이 저의 구원의 결정적 요소라 확신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학문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새로운 해석, 새로운 관점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저의 사고와 행동 패턴이 서구 교육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근본은 헬라철학에 기반을 둔 이성주의요 인본주의였습니다. 그 위험성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목회의 중요한 부분임을 인식하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몽골 선교현장에서 교회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지도자를 발굴하고 양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몽골 장로교 신학교에서 학생처장으로 보직교수로 사역했습니다. 저의 신학과 경험이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계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교육의 정도나 지식의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명사적 하나님이 아니라 동사적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분 안에 내가 알고 깨닫고 믿는 바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순종과 결단과 헌신과 분리될 수 없음을... 그것이 신학함의 근본이 되어야 함을 늘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럴 것 같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분리가 아닌 통합함, 전인격성을 지향합니다. 지난 주 토요일 받은 전화 한 통으로 고민을 하다가 설교를 영어로 번역하여 동시에 PPT로 보여주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영어설교가 준비됨을 그 자매에게 알렸습니다. 오늘 올지 확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학함과 목회함에 있어서의 고민에 기인한 결정과 행함을, 용기 있게 실천하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번역으로 섬기고 수고해 주신 무영 형제에게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