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추구하는 삶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많은 한계를 경험합니다. 글로 표현하든지 말로 표현하든지 원래의 의도보다는 굴절되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때로는 전달하는 당시의 억양이나 표정이 그 본래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더 중요한 요소라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요즘 설교나 책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많이 듣거나 읽게 됩니다. 본질(本質)의 사전적 의미는 '① 본바탕.② 본디부터 갖고 있는 사물 독자의 성질이나 모습③ (철학)사물의 현상의 뒤에 있는 실재. 본체(本體).'라고 정의합니다. 이 정의도 쉽지 않습니다.
제가 몽골 선교 사역을 정리하고 북미에서 경험하고 공부를 하면서 배우고 고민한 결과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본질은 선교다.' 라는 진술입니다. 저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에 대한 연구를 하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 진술은 부족한 연구의 결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질을 말하고 행하라고 하지만 자칫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인간의 죄인 됨을 그리스도인들은 인정합니다. 인간의 전적부패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다양합니다. 실상 많은 이슈들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같은 성경구절 한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팽팽한 논쟁이 이어지거나 상대방을 비난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인간이 죄인이기에 칭찬하면 안된다. 인간이 교만해지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하면 그들의 인간관계와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될까요? 인간이 죄인이기에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애쓰는 것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설사 그가 교만에 빠지고 또 다시 인간 본연의 죄악을 증명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하심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만을 또 경험하더라도 그를 교정하고 새롭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실 이는 하나님이시지 우리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 모두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우리 모두가 전적 부패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겸손하여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판단을 하거나 어떤 중립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격려가 필요합니다. 칭찬이 필요합니다. 어떤 실패를 바라보면 스스로를 돌아보며, 서로 아파하고 보듬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세상에서 환영 받지 못합니다. 거룩과 구별된 삶에 대한 잘못된 적용 때문입니다. 본질을 말하면서 이원론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에 대해, 죄로 인한 비참함에 대해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고, 세상의 죄를 나의 죄로 여기고 회개하는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같이 기뻐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를 구별하고 구원 받은 자로서 판단함에 있어서는 빠른데, 함께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세속적인 사람이라고 판단 받기를 두려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죄인과 한통속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은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체는 그러한 과정을 함께 하는 것이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