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글을 쓴다는 것, 말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말과 글에는 인격과 삶이 담기고, 사상과 철학이 배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 모두는 어지간해서는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철저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이 강조되고 가르쳐지고 습득되는 시대입니다. 듣고 보고 읽는 사람들도 그러한 것을 셈을 합니다. 대화도 만남도 글도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철저히 타자 중심이 되어야 겸손하다고 인정받고, 얻는 것이 있는 시대입니다.
한 모임에서 목회자와 교회에 대해 상처 받고 여러 가지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한 집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글뿐만이 아니라 목사는 매주 적어도 한 번은 공적인 예배에서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분은 그것 자체가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 안에 엄청난 반작용이 자동적으로 일어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칼럼을 통해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에는 수많은 양식과 내용, 주제가 있습니다. 수필, 시, 혹은 자서전 형식 등등으로 말입니다. 결국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변변치 않은 사람이지만 목사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목회적 고민과 소신을 밝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겸손하지 않아 보일 때도 있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권위주의로 가득한 사람처럼 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가식적인 사람으로 평가 받기도 합니다(대부분 목사님들의 고민임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지난밤 한국에서의 일을 아실 것입니다. DMZ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논평을 쏟아 냅니다. 북한 전문가들, 정치인들, 외교가들이 아닌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분들의 말을 접합니다. 존경하는 교수님들, 선교사들, 성도님들, 공적 영향력을 가지신 그리스도인들이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소위 ‘우파’ 아니면 ‘좌파’ 입장에서 분석 평가하십니다. “미국 대통령의 정치 외교적 쇼다”, “무엇을 얻었는가?”, “000 대통령 대단하다.” 등등등... 각자의 소신과 견해와 경험에 기반한 말들이 전해집니다. 어떤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인식이 결여된 이분법적 대응이 대부분이어서 가슴 아팠습니다. 적어도 이 사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사람 앞에서 침묵이 나은 것 같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도, 불신자도 쓰셨습니다. 그분 앞에서 기도함이 절실합니다. 그나저나 마냥 침묵만을 할 수 없어서 고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삶으로 살아내고 말하기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말 자체가 부담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