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노라
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 담임, 고려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님의 글을 편집하여 나눕니다.
‘고난주간’이다. 그리고 ‘부활주일’이 다가오고 있다. 기독교계는 여러 행사로 바쁘다. ‘한 끼 금식’, ‘미디어 금식’, ‘핸드폰 금식’ 등. 여러 종류의 고난 체험을 기획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분의 고난이 왜 필요했는지를 묵상해야 할 것이다. 우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2세기경부터 교회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를 일 년에 한 번씩하면서 교회의 전통이 되었다. 중세 때에는 더 많은 축제일을 만들어 매년 시행했다. 종교 개혁가들은 교회의 축제일을 폐지했다. 교회의 축제일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믿음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절기들은 이미 사회에 관습화 되어 폐지는 쉽지 않았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역하다가 쫓겨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기독교 축제일을 없앤 것이었다. 제네바 의회는 칼빈과 그의 동료들을 쫓아내고 교회절기를 다시 부활시켰다. 하지만, 칼빈이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복귀하면서 그 모든 절기를 폐지했다.
그 후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1574년 도르트레흐트 노회가 기독교 연례 절기 행사를 모두 취소하고 주일 하나면 충분하다고 결정했다. 단지 ‘성탄주일’과 ‘부활주일’, 그리고 ‘성령 강림주일’에 그 주제에 관한 설교를 하는 것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지. 그렇지만 보통의 주일보다 더 나은 어떤 특별한 축제로 지키지는 않았다.
고난주간에 특별히 절제하며 금식하며 고난을 체험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한다. 감동적인 체험의 기회일 수 있지만, 얼마나 복음적이며 성경적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물론 유익한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은 다른 시기와 때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교회가 특별한 여러 축제와 절기들을 만듦으로서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있음을 기억하며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탄절이 세속화되어 복음이 희석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고난절기와 부활절도 마찬가지 차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부활절’이라는 용어보다 ‘부활주일’이라 부르면 좋겠다. 이 날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설교를 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매 일요일마다 예배하는 주일(主日)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최고의 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매 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지켜가도록 더 애써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부정하고 미워하고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하지 않을까?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다. 죽어야 부활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일상에서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의 신앙생활이 부족할수록 어떤 특별한 한 날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바울의 다음 고백(고전 15:31)을 기억하며 매일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자.
“나는 날마다 죽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