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질그릇생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 섭리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 섭리6

김태길목사

6.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전에 지은 죄들로 인해 눈을 어둡게 하시고 마음을 강퍅케 하신 사악하고 불경한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은 그들의이해를 밝혀 주고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 자신의 은혜를 허락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은사를 빼앗아 가신다또한 그들의 부패가 죄를 범하는 기회가 되는 그런 것들에 그들을 노출시킨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을 그들 자신의 정욕과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권세에 맡겨 버리신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들 아래에서도 강퍅케 된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주제들이 많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동정녀 탄생, 성육신, 몸의 부활 등이 그것이다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위배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초자연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는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비추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듯한 일을 행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이 마치 자신의 거룩을 스스로 훼손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애굽의 바로 왕을 강퍅케 (개역개정에는 완악하게로 번역) 하신 사건이다. 출애굽기 4장부터 14장에 걸쳐 무려 여덟 번씩이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하셨다고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내가 읽은 책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설명은 마틴 루터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어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하십니까? 만약 누가이런 질문을 한다면, 그 사람은 이런 질문도 같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주셔서 십자가의 부끄러운 죽음을 당하게 하시고그로써 가련한 우리에게 진노보다 사랑을 더욱 나타내셨습니까? 상반된 질문을 떠올려보면 실상이 좀 더 온전하게 파악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성이 닿을 수 없는 당신의 신적인 섭리와 기이한 지혜로써 왜 이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저 사람의 마음은 완고하게 하시는가?” 이것은 피조물인 우리가 품어야 할 질문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과 행동에 대해서 각 사람에게 일일이 해명하셔야 한다면 약하고 단순한 분에 지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 구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7). 우리도 훗날 우리의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날이 오기 전까지는 비록 불행과 곤고와 고통에 눌려 지낼지라도하나님께서 우리가 육체로든 영혼으로든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유익이 되도록 해주실 것을 굳게 신뢰해야 합니다.  [탁상담화,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72-73]

   

    사람들은 사물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저마다의 잣대를 가진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에 대해서 만큼은 이상한 잣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것은 당연하듯이 받아들이면서, 자격 없는 자에게 자격 없는 것만큼 대우해 주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표시한다그러면서 어김없이 쓰는 표현은 불공평 하다이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의 혈족이나 되는 듯 성경에서 불공평의 처우를 받은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지나친 동정심을 나타내거나심지어 그들의 입장을 변론하기까지 한다. 평소 박애주의자도 아닌 사람들마저 성경의 악인들을 두둔한다.

 

    그럼 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열 가지 재앙 앞에서 무너져 가는 바로의 모습에 통쾌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너무 하신 것 같은 섭섭한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에 대한 그릇된 이해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선인에게 은혜란 필요치 않다. 은혜가 필요한 상태라는 것은 이미 그가 악인이라는 뜻이다. 악인에게 내려져야 하는 것은 형벌 밖에는 없다. 그런데 그 형벌을 내리지 않겠다고 결정하신것이 은혜의 시작이다. 그 은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형벌은 하나님 자신에게 부여하겠다고 결정하신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은혜의 하이라이트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 아이가 고의로 옆집 사람의 새로 산 차를 동전으로 긁어 놓았다그런데 뻔뻔하게 사과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수리비를 물러 줄 돈도 없다.차 주인은 그 아이가 법적 처벌을 받게 하든지, 아니면 없던 일로 용서해 주는 것밖에 없다. 결국 이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돈도 받지 않고, 어떤처벌도 하지 않기로 한다. 여기까지가 사람이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긍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여기에서 한발 짝 더 나아간다. 하나님 자신 스스로에게 처벌을 내리시는것이다. 차 주인이 아이를 용서해 주는 대신 자신에게 처벌을 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실 때,반드시 죄값을 치르셔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 중에 거룩이라는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공의는 하나님의 거룩을나타내는 정의의 칼날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 값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2:17, 6:23, 17:11).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칼을 자신에게 겨누시고 자신이 그 죽음의 처벌을 손수 감당하신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처벌의 “집행자”가 되시고, 성자 하나님은 그 처벌의 대상자가 스스로 되신 셈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진수다. 이렇게 보면 라는존재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너무 커서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따지고 드는 뻔뻔함이 생겨나기 힘들다. 나에게주신 은혜와 감격만 감당하기에도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로의 경우에 어떻게 이해하면 우리의 마음의 갑갑증이 해소 될 수 있을까? R. C. Sproul의말이 매우 와 닿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억제력을 철회하시면 곧,바로의 마음은 강퍅하게 되는 것이다. 강퍅함 그 자체가 심판이고 그때 바로는 당신이 내 마음을 강퍅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죄를 지었고, 어떤 다른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불평할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부흥과개혁사, p. 237]

 

    여기에서 두 가지 요점으로 정리가 된다. 첫째, 하나님의억제력을 철회하신 사건이 곧 바로가 강퍅하게 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과, 둘째, 강퍅함 그 자체가 바로에게 심판이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바로의 마음을 악한쪽으로 기울게 하셔서 죄를 짓게 했다면,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될 것이므로 바로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다그러나 하나님은 억제력이라는 은혜로 바로를 붙잡고 계시다가, 그것을 철회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원래 본성으로더 자신을 자극하고, 활개치면서 마음이 강퍅하게 된 것이다. 이 하나님의 억제력을 거두어 가신 것은 곧 심판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된 것은 그가 받아야 마땅한 죄값의 결과물일 뿐이다.

2/4/2017 11:50: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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